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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정과를 사용하는 유익함에 대해서 IV

  • Post category:Ho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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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정과를 사용하여 설교를 준비하는 유익함에 대해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오늘은 4번째 설교자가 성서정과를 사용하여 설교준비를 하면 목사의 개인적 사심에 따라 설교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 성경을 더욱 다채롭게 보고 다루게 된다.
  2. 교회력에 따라 설교를 준비할 수 있다.
  3.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4. 목사의 개인적 사심에 따라 설교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5. 1년 또는 3년까지의 설교 일정을 미리 만들어 놓을 수 있다.

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은 지독한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성경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세계를 오늘날 그 시대가 겪고있는 특별한 상황에서 이해가 되고 말이 되게 풀어 놓는 작업 자체도 힘는 작업이 아닐 수 없는데, 설교자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껴야 하며 성도들의 고통과 연대해야 한다. 그래서 선포되는 말씀이 단지 인간의 교훈을 늘어놓거나 교인들을 도덕적으로 훈계하거나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엔터테인먼트가 되지 않아야 한다. 설교가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 설교자는 자신을 죽이는 작업을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해야 하기 때문에 설교를 준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며 지독한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불쑥 불쑥 나의 생각이 드러나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자제해야 하며, 내가 받은 것을 배로 갚아주고 싶은 복수심 또한 눌러 없애야 한다. 그런 생각들은 성령이 주시는 생각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친구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교회안의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교회 안에서의 폭력은 물리적 폭력이 아닌 형태로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사실은 규정짓기가 힘들다. 그러나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서 폭력은 여러가지 형태로 양방향으로 행해질 수 있다. 친구 목사님과 일명, Ecclesial Violence라 이름 지은 교회 내에서의 폭력은 규정짓기가 힘든 동시에 알아채기도 힘들다. 당사자가 아니면 잘 못 알아 듣고 지나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을 거꾸로 하면 당사자들은 말못할 고민에 빠지고 충격을 받을 수 있는 일종의 정신적인 학대에 해당하는 일일 수 있다. 내가 한국에서 또는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를 다니면서 경험했던 많은 한국 설교자들 가운데서 많은 수에 해당하는 목회자들이,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설교의 본문과 지난 주 혹은 몇 주전에 있었던 일들과 연결지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쪽으로 설교 전체의 논리를 끌고나가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하는 것을 목격하고 경험했다. 듣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지만 어디에다가 내어 놓고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내가 혼자 과민반응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도 있고, 목회자의 설교를 대놓고 비판할 용기가 잘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애매한 지점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고 일부의 건전하지 않은 생각을 갖은 목회자들은 이 지점을 악용할 가능성이 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성의 힘의 방향은 결코 한 방향이 아니라 앞서 이야기했다. 반대 방향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목회자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들을 동원해서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하는 일은 교회 안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 선한 뜻을 품고 목회를 열심히 하고자 하는 목회자들을 보이지 않는 교묘한 방법으로 공격해서 넘어지게 하고 의지를 꺾는 일도 보이지 않게 일어난다. 그런 일들을 경험한 목회자는 순수했던 초심을 잃고 복수의 의지를 다지는 또 다른 폭력의 가해자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고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일은 드물다.) 독이 오른, 또는 생각이 건전하지 않은 목회자들이 설교를 자신의 생각을 성도들에게 주입하는 무대로 생각하게 된다면 정말 큰일이 일어난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지도 않고 신학적인 의미도 담고 있지 않은 한 개인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를 차지하고 사람들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예수를 믿지 않는 교회가 탄생할 수 있다. 오늘날 그러한 교회를 우리는 많이 보고 있지 않은가.

성서정과를 사용하는 일은 말씀을 개인적으로 유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만 삼게 되는 일을 어느 정도는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그 주에 읽어야 하는 말씀과 선포되어야 하는 말씀의 바운더리가 주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서 개인의 이야기와 결부시켜 말도 되지 않는 설교, 또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설교, 또는 짜맞추기식 설교, 복수하고자 하는 폭력성을 담고 있는 설교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느 정도 차단해 준다.

미국장로교회에서는 그 주에 선포되는 말씀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목회자의 고유한 권한으로 인정한다. 미국장로교 헌법 규례서 ‘W-2.0304: 말씀과 성례전의 목사’ 항목에 따르면, “목사는 다음과 같은 일들에 책임을 진다: 봉독할 성경 말씀의 선택, 설교 준비, 드려질 기도, 노래할 음악 선곡, 해당 예배를 위한 예배 보조 인쇄물 혹은 미디어 사용, 그리고 특정 예배 시간에서의 연극, 춤 및 다른 예술 형태의 사용.” 이러한 부분들을 사역장로 (일반 교회의 장로)들과 당회를 이루어서 공동책임을 지는 분야가 아닌, 목사의 고유한 책무라고 규정하고 있다. 큰 권한을 부여 받은 만큼 그에 대한 부담도 막중하다. 그 책임지는 고유한 책무들을 통해서 목사는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짓는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말씀을 사사로이 개인적인 감정을 푸는데 사용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막중한 책무에 숨이 막힐 것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한 주 한 주의 말씀을 선택함에 있어서 매번 이러한 큰 중압감을 받는다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또는 그 과정이 너무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원하는대로 아무 말씀이나 골라서 사용하게 될 수도 있다. 또는 기존에 자신이 익히 잘 알고 있고 여러 번 설교해 봐서 자신에게 편한 말씀을 위주로 늘 말씀을 선택하게 될 가능성도 생긴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성서정과를 사용함으로써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다.

예배에 대한 책임을 완수하는 것, 목사 뿐 아니라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