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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본질이 예배다? 대면예배 논란에 대해서.

  • Post category: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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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개신교의 상식과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인해 그 동안 성공적이라 평가받아 왔던 한국의 코로나19 방역에 비상등이 켜졌다. 전국적으로 퍼진 극우 광화문 집회의 참석자들은 일부러 전화를 끄고, 집 근처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아다니며, 자신이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숨긴 채 많은 사람들을 코로나19 전염의 잠재적인 피해자로 만들었다. 한 사람의 확진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킬 수 있는지를 우리는 대구의 슈퍼전파자 31번 확진자를 통해서 보았다. 아직 그 수를 다 파악하지도 못했지만, 지난 8.15 극우 광화문 집회에는 1만여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가 흩어졌다. 그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었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n차 감염의 희생자가 될지 짐작도 하기 힘든 상황이다. 개신교회 전체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전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 중에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교회지도자 16인과의 간담회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대면예배를 고수함으로써 전국민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일부 교회의 행태를 지적하며 어려움이 있겠지만 함께 힘을 모아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대해 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회장이 답변했다. 

“종교의 자유를 너무 쉽게 공권력으로 제한할 수 있고 중단을 명령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려서 크게 놀랐다.”

그분들께서 ‘종교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하시는 말씀인지 나는 궁금하다. 종교의 자유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신앙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전염병의 상황에서 국민들의 소중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발동한 행정명령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은 종교의 자유의 정의상 맞지 않는 주장이다. 행정명령이 종교를 갖거나 갖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전염병 통제를 위한 종교적 집회를 일정 기간 전에 하던 방식으로 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어디에나 책임 없는 무제한의 ‘자유’를 가져다 붙이기를 좋아하는 한국 극우세력들의 레파토리와 너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맥 파악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한국어 공부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종교인으로서의 사회적인 책임을 방기해서는 안된다. 종교인의 기본 목적은 철저히 ‘나’중심이었던 세계관에서 ‘신’ 중심의 세계관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을 갖은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제한적인 ‘나’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전적인 타자를 끌어 안을 수 있는 포용적인 자세를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많은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사랑’은 철저한 자기비움(self-emptiness)을 전제로 한다. 남이야 어떻게 되던, 자신의 생각과 계획만을 일방적이로 주장하는 태도로는 자기비움의 정신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런 증상이 심해지는 경우에는 병리적인 영역에서 다뤄야 한다. ‘나’의 행위로 인해서 사랑과 포용의 대상인 ‘타인’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상황에 명백한 경우에 신앙인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하겠는가? 당연하게도 성경에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교회 본질인 예배를 지키는 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코로나가 한 두 주, 한 두 달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볼 때 대책 없이 교회 문을 닫고 비대면·온라인 예배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

예배가 신앙 생활의 중심이며 매우 중요한 신앙의 프렉티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배에 대한 정의와 교회에 대한 정의에 나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분들이 예배를 무엇이라 생각하는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미국장로교 규례서 제 1장 기독교 예배신학 ‘W-1.0101: 하나님께 영광’에서 기독교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한다. “기독교 예배는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양과 감사를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특별히 말씀과 성례전의 은사를 통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예배로 모인다. 우리는 세상에 거하시며 활동하시는 동일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섬기는 삶으로 보내심을 받는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말씀과 성례전이 행해져야 하며, 신앙인들은 예배를 통해 섬기는 삶으로 거듭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예배의 시작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다. 예배하는 신앙인들이 이 땅에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세상에 나가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예배의 정의이다. 십자가를 메단 한 건물에 모여서 목사의 설교를 듣다가 헤어지는 것을 예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매우 부족한 정의이다.

미국장로교 규례서 1장 기독교 예배신학 ‘W-1.0203: 공간 ‘은 예배의 공간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예배할 수 있다. 구약 성경은 사람들이 모이고 하나님을 만난 돌 제단, 성막, 성전, 그리고 다른 장소들을 묘사한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회당과 성전에서 예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광야, 언덕, 그리고 호숫가에서 예배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어느 한 장소에 한정 될 수 없음을 보이셨다.” 예배의 장소는 ‘교회’라고 이해되는 한 건물이 아니다. 성스러운 장소와 그렇지 않은 장소에 대한 구분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지 실제는 그렇지 않다. 어느 곳에나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그분께 어느 곳에서나 드려질 수 있다.

그러면 위의 두 가지 내용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예배는 섬기는 삶이라는 결과를 도출해 내야하고 어느 곳에서나 드려질 수 있다. 그 어느 곳이라는 개념은 인터넷 공간도 포함한다. 한국보다 미국의 코로나19 상황이 더욱 위급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장로교회는 모든 교회의 예배를 대면예배가 아닌 온라인 예배로 전환할 것을 개교회에 주문했다. 대면예배를 드리는 것이 교인들과 불특정한 이웃들을 잠재적인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면, 그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부족하고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거의 모든 미국장로교회는 지난 3월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8월까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예배의 정의에 따라 비대면, 온라인 예배는 불편할 수는 있으나 부족한 예배는 아니다. 특히 예배의 정의에 ‘섬기는 삶으로의 변화’라는 부분이 똑같이 강조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형식의 예배이던 그것은 부족한 예배가 될 것이다. 대면예배가 자신 뿐 아니라 이웃에게도 큰 해를 끼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그것은 ‘섬기는 삶으로의 변화’를 이뤄내지 못하는 것임으로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 판단한다.

‘교회의 본질은 예배다.’라는 말은 맞으면서도 틀린 말이다. 교회의 본질은 신앙을 갖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 비전은 거듭남으로서의 구원이고 개인적인 구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원과 자연계의 구원까지 아우르는 더욱 큰 개념이다. 하나님의 주권, 통치라는 개념 역시 이러한 견지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구체화 시키는 부름 받은 하나님의 파트너로서 이 땅에 존재한다. (교회라는 개념은 건물이나 특정한 단체가 아닌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배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위에서 예배를 정의한 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세상에 나아가 그 경험을 통해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까지가 예배이다. ‘교회의 본질이 예배다.’라고 정의하면, 자칫 교회의 목적과 예배의 넒은 정의를 한 건물에 특정한 시간에 모여서 대면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예배의 넒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것임을 주지한 상태에서 ‘교회의 본질은 예배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받아들 일 수 있다. 그러나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면 교회의 본질이 깨어질 수 있다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씀은 없다.

“정부 관계자들께서 교회와 사찰, 성당 같은 종교단체를 영업장이나 사업장 취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단 타종교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언사에 신중했으면 한다. 자칫 이 말은 본인이 사찰과 성당까지 대표하는 종교인으로 자처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쪽 분들 어느 누구도 그렇게 부탁한 적 없는 것 같으니 이 말씀은 취소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큰 실례일 수 있다. 또한 영업장과 사업장을 운영하시면서 이 고통의 시간을 함께 감내하며 버티고 있는 분들께도 예의가 아니라 생각한다.

이 말의 이면을 살펴보면 ‘교회는 사익을 도모하는 이익집단과는 다르다.’라는 의미로 읽힌다. 맞다.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교회는 종교기관으로서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단체가 아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은 종교기관으로서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특히 교주처럼 군림하고 있는 담임목사들이 공고한 지배를 하고 있는 많은 대형교회들은 사적이익을 추구함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마치 교회를 자신의 영업장, 사업장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러한 생각이 통용되는 곳이기에 자신의 자녀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일까지도 저지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영업장과 사업장을 운영하시는 분들에게는 상도덕이라는 것이 있고, 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경우에는 제재를 받게 된다. 교회에 군림하고 있는 소위 큰 목사들은 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교회를 교회 답게 한 이후 에야 부끄러움 없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말을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교회와 소위 교계의 리더라는 목사들의 부끄러운 부분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라는 표현이 불현듯 떠오른다. 혹시 오해할 까봐 적어 두는데, 그 표현과 이 사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냥 생각이 났을 뿐이다.

교회라는 종교기관은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이익집단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그 다름을 무엇으로 보여줄 것인가? 2의 예배의 정의에서 이야기했듯이 세상을 섬기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하나님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이런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집단과 다르게 구분되는 것이다. 만약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우리는 다른 집단과는 다르다는 ‘구분됨’만을 주장하며 법 위에 군림하려 오만한 태도를 취한다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교회가 교회 답지 못하다는 비판을 마주하게 된다. 과연 한국의 교회 중 몇 교회나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것인가?  

그래서…

한국 개신교의 미래는 매우 어둡다. 그러나 동시에 밝다. 예수께서 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유대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해서 그 자리에 있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하면 안되는 것이 그들의 율법이었다. 혹시 예수께서 안식일에도 병자를 낫게 하시면 그것을 빌미 삼아 예수를 제거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손이 불편한 한 사람을 불러 한 가운데 세우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물으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과 악한 일을 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습니까?’ 그리고 그 손이 불편한 사람을 고치셨다. 이 일로 유대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한 모의를 시작한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의 시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의 미래는 매우 암울하고 어둡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적이다. 부활의 신앙은 죽음과 생명이 다름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