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우리의 인생은 그 빈 무덤가를 서성이는 것과 같다.

부활절: 우리의 인생은 그 빈 무덤가를 서성이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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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죽음의 필연성을 내포한다. 그것이 내가 쉽게 부활의 기쁨에 들뜨지 못하는 이유다. 부활을 전제하는 죽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니 죽음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결론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과정이나 전제는 뒷전으로 밀려나 적절한 대접을 받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합당하고도 진지한 고찰을 잃은 부활의 기쁨은 가볍기 그지없다. 부활의 기쁨은 절망의 끝에서 발견한 죽음에 대한 이해가 전제될 때 의미를 갖는다. 성경의 이야기들과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의 네러티브는 절망이 희망의 다른 이름임을, 죽음이 부활의 다른 이름임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부활의 이야기는 희망에 대한 고찰이 아닌 절망에 대한 고찰이다. ‘자아’의 죽음은 절망의 끝에서 발견한 희망의 단서가 된다.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길은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오늘 한번 이 길을 가볼까하며 떠나는 그런 낭만적인 여행 길이 아니다. 그 길은 철저한 절망에서 시작한다. 남겨진 빈 무덤이 절망의 끝,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인생은 그 빈 무덤가를 서성이는 것과 같다.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으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공허하기만 하다. 무엇인가 손에 잡히는 것 같았지만 결코 아무것도 손에 그러쥘 수 없다. 노력하면 할 수록 빈 무덤의 공허함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렇게 허공에 날리는 먼지를 바라보며 헛된 꿈을 꾸는 것이 인생이다. 빈무덤가에서 갈 곳 몰라 헤메이는 발끝을 멈추고 차마 믿기 힘든 비현실적인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내 이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가 조금 전 부활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희망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다만 절망이 끝나가는 순간이 희망을 볼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일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허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거짓된 속삭임에 넘어가지만 빈 무덤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희망을 찾기 위해 먼저 절망을 숙고한다. 희망은 우리의 생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희망이란 짙은 오후의 숲에서 간간히 나무 틈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과 같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현실이란 빽빽한 숲에서 빛을 발견하기 어려울 때에, 바람 결에 잠깐씩 드러나는 햇살은 숲에서 기인하지도 않고 나에게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빛은 무한하고 언제나 거기에 있다. 그 빛이 빈 무덤가를 서성이던 나의 삶에 드러나는 찰나의 순간, 그 빛 안에서 나는 초월적인 신비를 마주한다. 그 순간 비로서 나는 부활의 희망을 기억한다. 부활의 희망은 그렇게 우리에게 온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은 현실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아니, 현실의 벽을 벽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고 온다. 희망은 기존 인식의 한계를 부수고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해준다. 어쩌면 이것이 희망의 정의일지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희망을 인식하고 새로움을 잉태하는 모두에게 언제나 현실이 된다. 현실화된 희망은 하나님 안에 있는 무한한 실현가능성들을 우리의 현실로 불러오는 힘이 있다. 태초의 창조는 그렇게 우리의 삶에서 연속성을 가지고 계속되고 있다. 이 깨달음 안에서 죽음은 부활이라 불리는 새로운 창조의 한 과정일 뿐이다. 죽음과 부활, 절망과 희망은 모두 과정이다. 모든 과정은 늘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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