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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과학과 신학의 대화

  • Post category: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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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2일 올해 들어 첫번째 모임이 시작된다. 작년 말에는 파사데나 과신대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함께 고민하며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함께 갖었다. 단순히 창조과학만을 문제삼고 왜 창조과학계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허구인가를 밝히는 일이나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입문편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을 반복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더 깊이있는 논의와 생각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 첫번째로 성서학과 과학이라는 주제를 다루기로 했다. 세 개의 읽기 교재가 있는데, Troetsch, “Historical and Dogmatic Method in Theology”,Finkelstein, “The Bible Unearthed”, Hoffmeier, “These things Happened: Why a Historical Exodus is Essential for Theology.” 이다. 각자 정해진 분량을 요약해서 함께 나누기로 했다. 내가 맡은 부분은 세번째 리딩인데, 요약본을 이 곳에 올려 둔다.

성서신학이 나의 전공분야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신학을 공부해온 학자의 입장에서 Hoffmeier의 글은 학문적으로는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가 대변하고 있는 Evangelical의 성서신학의 입장은 목사로서 충분히 이해한다. 이 글의 요약을 마치며 몇 개의 커멘트를 아래에 남긴다.

  1. 역사적 사실성이 신학의 authenticity와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는가?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이 아니거나 또는 왜곡되었다면 성경의 여러가지 사건들의 네러티브가 담지하고 있는 하나님 이야기, 즉 신학적인 implications 들이 모두 그 유효성을 잃고 마는 것인가? 어차피 기록된 역사는 선택된 역사이지 있는 그대로의 역사일 수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역사는 더 이상 거시적인 관점의 역사가 아닌 미시적인 역사이다. 개개의 네러티브가 중요하고, 그 네러티브들은 또 다른 네러티브들과의 연관관계 안에서 역사적 유의미성을 확보한다. 그리고 그 자체로 역사적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이야기는 자신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이야기의 영향력이 더 큰가 작은가의 이야기는 논할 수 있겠지만 가치 자체의 경중을 논할 수는 없다. 모든 이야기는 가치가 있다. 성서의 역사적 사실성을 이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성서의 네러티브들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역사적인 실재성이 확보되는가와는 별개로 성서의 다른 네러티브들과의 관계 안에서 그 독특성을 확보한다. 다시 말해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2. 아니면 말고 식의 방법이 학문적 정합성을 확보하기는 어렵다. 특히 역사에 있어서 있지 않았던 일을 있지 않았다고 증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있었던 일을 있었다고 증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없는 것을 없다고 증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도대체 무슨 수로 그런 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까? 이것은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한 적이 없는 일,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일,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던 일을 증명하라는 것은 애초에 이미 답을 다 내려 놨으니 자백을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시 돌아가면, Hoffmeier는 글 중간에 갑자기 무죄추정의 원칙을 이야기한다. 죄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역사학에 들이대는 것이 맞는가? 모든 일에 역사적 증거가 발견될 수는 없다. 그래서 역사적 상상력은 이 공백을 메꾸는데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역사에 대한 한 이론이 학문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식의 방법을 들이댄다면 그것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이 다르게 생각한다면 그런 일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보라는 식이다. 그것이 증명이 되기 전까지는 내 생각을 맞는 것으로 여기겠다는 주장이다. 없었던 일을 없었다고 증명하는 일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 머리가 아프다.
  3. 역사는 의미의 역사다. 어차피 모든 역사는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들의 재구성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역사적 기술은 관점을 가지기 마련이다. 성서역시 하나 혹은 여러개의 관점들을 가지고 기술된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성서의 내러티브의 authenticity에 흠이 가는 것은 아니다. 모세가 모세오경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모세오경이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이 거짓이라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모세오경의 네러티브들은 서로의 관계안에서 그리고 각자가 확보하고 있는 의미의 독특성 안에서 신학적인 정당성을 확보한다. 여전히 의미있다는 말이다. 객관적인 역사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미신이다. 모더니즘의 역사적 관점에서 벗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