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currently viewing 인종주의와 복음

인종주의와 복음

  • Post category:Theology
  • Reading time:2 mins read

킹 목사의 정신을 기리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데이가 얼마전에 지나갔다. 그의 부르짖음은 모든 인간이 똑같지 않다고 믿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던 한 시대의 종언을 선언했으며 동시에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현실화 해 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시대적 소명과 요청은 우리 모두가 숙제로 떠 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장로교 PCUSA는 오랜기간 인종주의와 싸워왔다. 그리고 주로 백인으로 이루어진 지역 교회의 인종구성비를 바꾸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백인 교회의 아시안 목사로 사역한 경험이 있는 나는 고상한 정신과 현실사이의 벽을 경험해야만 했다. 아직까지 그 벽은 높기만 하다.

미국장로교회에서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교단 내에 구현하기 위해 마태복음 25운동을 벌이고 있다. #Matthew25 세가지의 주요한 테마중 한 가지가 이 사회에 현존하는 구조화된 인종주의 (structural racism)를 거부할 뿐 아니라 철폐해 나가려는 비전이다. 이것은 킹 목사의 비전이기도 했다. 그가 꿈꿨던 그 ‘드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모든 인간의 내재적인 가치를 긍정하고 차별적인 인식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이 단 한가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예수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구현해 내야 한다.

나의 좋은 친구인 Sammuel Son 목사님은 미국장로교 PCUSA에서 다인종 사역을 담당하는 ‘다양성과 화해를 위한 부서’ 책임자이다. 얼마전 손목사님이 쓴 글 중 내면화된 인종주의에 대한 통찰력있는 글을 번역할 기회가 있었다. 중앙일보 기사에는 그 일부가 발췌되어 올라가 있고 전문은 이 곳에 올린다.

written by the Rev. Samuel Son and translated by the Rev. Dongwoo Lee

내가 언제부터 거울을 들여다볼 때 내 얼굴을 응시하면서 내 눈이 너무 가늘고 쭉 찢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아마도 7살 즈음 미국에 오게 된 후부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눈 가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면서 얼굴 모양이 변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방식대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우리가 머리속에서 생각하는 자아상은 소위 ‘거울’을 통해 만들어지고 이 거울은 복도나 화장실에 달린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유리가 아닌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우리 안에 형성된 우리의 얼굴을 의미한다.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가 자기 눈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데어 쭉 잡아당기며 나를 ‘칭크(chink)’라고 부르며 놀렸을 때, 그것은 나의 자아상이 되었다.

한국어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미국에 오기 전에 나는 한국어 이외에 다른 언어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나는 한국어에 대해 어떠한 미학적인 판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종이에 쓰여진 한국어는 아주 날렵해 보였었고 모음의 소리를 길게 늘이거나 심지어는 노래로 부를 수 있었던 것을 좋아했던 것을 기억할 뿐이다. 한국어와 비교할 만한 다른 언어를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어떤 가치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미국에 오게 되었을 때, 나는 영어를 빨리 배워야만 했다. 그것은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영어를 배우면서 나는 한국어를 싫어하게 되었다. 언어는 제로섬 (zero sum) 게임이 아니다. 영어는 한국어에 반하는 언어가 아니다. 그러나 영어만 할 줄 아는 친구들이 한국어의 소리를 계단을 구르는 깡통같은 소리라고 조롱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아마 그 즈음부터 나의 어머니와 함께 Macy’s 백화점에 가는 것을 나는 싫어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백화점 점원과 문법에 맞지 않는 영어나 한국말로 흥정하는 것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백화점에서 흥정을 하는 것은 정말 ‘미국적이지 않은’ 일이었고 어머니가 한국말을 할 때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마네킹 뒤로 숨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나는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정의할 수 있다. 나는 그 때 인종주의를 내면화 시키고 있었다. 나는 미국인들이 한 인간을 판단하도록 세뇌시킨 인종주의적 렌즈를 통해 나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나는 백인들이 나를 볼 때 미국인들의 미적인 기준에 비춰 한참 모자라는 소리가 이상한 바보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황인종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인종주의의 교활한 점이다. 피부색을 가지고 사람을 정의하는 판단은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을 파고든다. 이러한 관점들이 정책들을 통해서 강제되고 지지되며 미디어는 이것을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이러한 현상에 대한 증거는 MSNBC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앤드류 양 (Andrew Yang)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방송국은 그의 이름을 존 양 (John Yang)이라고 잘못 호명했고, 그의 모금 차트와 투표 그래프는 나머지 다른 후보들의 것들과 함께 보여지지 않았으며, 지난 11월 20일에 있었던 민주당 후보들간의 토론에서 그 보다 표를 적게 받은 후보들이 더 긴 방송시간을 받았던데 비해, 그는 가장 적은 시간을 할해 받았었다.

한국 교회에서 자라는 동안 우리는 인종주의에 대해 많이 다루지 않았다. 우리가 인종주의와 복음이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생 시절부터 설교를 하기 시작했는데, 내가 비로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자각하기 시작한 것은 2009년이 되어서였다. 이것은 나에게 마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강한 빛 때문에 눈이 멀게 되었을 때 아나니아가 그를 위해서 기도했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며 비로소 말씀은 살아있는 것이 되었던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2009년이 되기 전까지 나는 오로지 한인 교회만을 섬겼다. 또 다른 인종주의의 충격이 있을 다른 문화의 맥락 안으로 들어가서 교회를 섬기는 내 자신을 나는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그 때, 한국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내가 목회하고 있던 영어 미니스트리에 오기 시작했다. 교차문화적(intercultural)이 되어가는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목회계획이 아니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던 제럴드 게이튼 (Gerald Gayton) 형제가 교회의 멤버가 되고 당회의 장로가 되었다. 그는 나의 아나니아였다. 그와의 우정은 내가 이제는 그의 눈을 통해 말씀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가장 처음 깨달은 것은 ‘구원’이 단순히 개인의 영생을 위한 영혼 구원의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구원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기반한 새로운 자아상과 윤리를 창조하는 것에 의한 다양한 문화들로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는 바울이 이야기한 에베소서 2:14절의 말씀과 같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로마서는 복음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가장 성숙한 해석을 담고 있는 책이라 종종 칭송된다. 바울은 이 책에서 복음에 대해 설명하면서 천국이나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에서 매우 길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갈라진 두 그룹의 사람들을 하나로 부르시는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새롭게 깨달음을 통해 하나가 되어가는지를 설명한다. 로마서의 핵심을 담고 있는 메시지는 로마서 15장 7절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복음은 단순히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길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함께 잘 사랑하기 위한 새로운 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복음에 대한 이런 확장된 이해를 바탕으로 나는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나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바울은 여기서 내가 씨름하고 있던 동화됨을 위한 자기 기만과 억압적 기재에 이름을 붙였다. 바울은 이것을 ‘거짓 복음’이라 불렀다. 신학자들은 이를 줄여서 ‘율법주의’라 했다. 이것은 율법에 복종함으로써 죄용서함을 받았다고 믿으려는 것을 말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경고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할례와는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 시대에 우리는 할례라는 이슈를 동화됨에 대한 이슈로 잘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 당시에 이방인들을 동화시키기 위해서 그들에게 겁을 주고 있는 사람들에 대항해 싸우고 있었다. 동시에 바울은 이방인들이 두려움 때문에 자기자신을 동화시키지 않도록 이방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할례에 대한 억압적 기재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다.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로 초대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 할례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결정했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우상에게 제사지낸 음식을 먹지 말것을 요청했는데 이것은 유대의 문화를 강제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정책이 베드로와 이방인들을 구분짓게 되는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오기전까지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다. 베드로는 우상에게 제사지낸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는 초대교회의 정책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전까지 이방인들과 한 식탁에 앉아서 먹다가 정죄 받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났다. 바울은 용감하게 모두의 앞에서 이것을 위선적인 행동이라 지적했고, 이것을 거짓 복음과 같은 비겁한 행동이라 불렀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갈라디아서 2:14)” 바울은 동화되도록 강제하는 억압을 이렇게 정의했다.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이것이 바로 거짓복음이다.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이방인들에게 하나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이 할례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교회 안에서 그들은 2등 시민일 뿐이라는 메시지였다. 이방인들은 그들이 취급 받는 그 방식대로 자신들을 바라보았다. 유대인들의 식문화를 따라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그들은 그 보다 더한 할례까지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꼈었다. 이것이 바로 거짓 복음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믿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 모두 또한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만 하도록 만들어 가도록 동화하는 것은 인간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정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의 선물에 있다고 증언한다. 이는 인간의 가치는 다른 그룹에 사람들에 의해서 주어지거나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은 내가 백인이 될 필요가 없다고 나에게 말한다. 복음은 나의 어머니가 영어를 완벽하게 말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한인 커뮤니티 안에 내면화된 인종주의가 작동하는 또 다른 방식이 있는데 나는 이것을 바울이 베드로의 죄를 지목한 것이라 정의하고 싶다. 한인 커뮤니티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히스패닉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것이 드러난다. 인종주의에서 그 기준은 백인이다. 구조화된 계층화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다른 인종은 백인들의 특징과 얼마나 근접해 있는가에 따라서 다른 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계층구조에서 황인종은 검은색 피부 인종이나 갈색 피부 인종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한국사람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나 히스패닉들에게 인종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방식으로 행동할 때, 우리는 인종주의적 계층화를 고착화 시키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내부에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편견들에 들어맞게 우리가 행동하는지를 보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렇게 편견은 노골적인 방식이 아닌, 우리의 의식이 닿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조정하며 우리의 경험을 조작하면서 작동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나는 나의 눈이 너무 쭉 찢어지고 못생겼다고 보아왔다. 그래서 나는 갈색 피부와 검은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덜 가치 있다고 보아왔다. 이 두 가지 시각 모두가 백인성 (whiteness)의 ‘율법주의’에서 기인한 왜곡된 것이다.

지난 여름에 나는 부모님을 내가 사는 곳 가까이 모시고 손자들과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인주택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몇 차례 연락을 했다. 나는 내 연락처와 메시지를 남겼으나 단 한번의 연락도 받지 못했다. 그 곳에 직접 두 번을 찾아갔지만 사무실 문에는 “지금은 사무실에 없습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라는 사인만 있었다.

주거시설 관리자가 2주후에 이메일에 대한 답장을 했다. 그녀의 구글 프로필 사진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주거시설 관리자가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의 사람일 것이라고 가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인으로서 종종 나는 이방인들이 일치를 강요받아 고통스러워한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나의 자아상과 자존심을 내세우며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 내가 유대인과 같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지키려고 했었는지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강력한 그리스-로마 제국에 살던 소수인종으로서, 일치에 대한 유혹과 싸우려는 부담에 대한 열의를 갖고 일치하거나 강요된 욕구 둘 모두를 갖고 있는 미국 사회 안에서 한인 커뮤니티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복음은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주어졌다. 복음은 내가 내 자신 스스로와 나의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었던 내면화된 편견과 다른 인종의 사람들에 대해 외면화 되어있는 편견 모두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어떤 인간의 판단도, 심지어 미디어와 정책들에 의해서 강요된 백인성의 율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판단 앞에 설 수는 없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백인성의 판단으로부터 자유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며 시인인 오드리 로데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두려움이나 경멸로 반응하며, 다음의 세 가지 중 한가지로 다름에 대해 행동하도록 프로그램 되어있다: 마치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그것을 무시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우세 하다면 그것을 따라한다. 그것이 열등하다고 생각한다면 파괴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다름에 대해 동등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패턴은 가지고 있지 않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패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자신 스스로 그것을 삶에서 살아내는데 생애를 바쳤고 용기 있게 교회들이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로마서12:2)” 살아갈 것을 간절히 바랬다.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인종의 렌즈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렌즈로 바라보는 것은 오늘 날에도 꾸준히 해나가야 할 일이다. 내가 인종적 편견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알고, 복음이 내가 관계 맺고 있는 타인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프로그래밍한다는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나는 결코 이 일이 끝마쳐졌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지금 이순간에도 나는 나의 어머니를 대신해 그녀의 완벽하지 않은 영어에 사과하고자 하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여전히 이 말씀을 붙들고 노력한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빌립보서 2:12-3)

Translated by the Rev. Dongwoo Lee, PhD Candidate. Jan 3, 2020

미주중앙일보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