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al Jesus
The misguided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and the Truth of the Traditional Gospels
Luke Timothy Johnson
Johnson이 이 책을 쓴 이유는 Jesus Seminar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몇 가지 이유를 들며 왜 Jesus Seminar의 목적과 방식에 동의할 수 없는지를 책 초반에 밝히고 있다. 저자는 ‘conservative Christians’의 입장에서 JS는 cultural confusion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는 몇몇 신학자들이 기독교인의 입장이나 성경의 중요성을 무시한 채로 문화적인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책을 더 많이 팔기위한 전략으로서 JS를 사용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번째 챕터를 읽으며 이 책을 끝까지 읽고 싶다는 생각을 모두 잃어 버렸다. Johnson은 JS에 대해 학문적인 정합성이나 JS가 다루고 있는 컨텐츠를 가지고 비판하는 것이 아닌 절차상의 특이성을 가지고 비난을 하는 수준의 커멘트를 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실망이 크다. 그가 들고 있는 JS가 비판받아야할 이유는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가 주장하고 있는 절차상의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다. 학자들끼리 모아 놓으면 서로의 의견에 더욱 크리티컬 해지기 때문에, 또 서로의 경쟁을 부추기기 때문에 JS가 사용하고 있는 ‘민주적인’ 방식의 vote는 역사적 예수를 찾아가는데 적합한 방식이 아니라 비판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가 들고 있는 비판의 이유들은 그가 주장하는 만큼의 직접적 연관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그가 또한 주장하고 있는 JS에 참석하거나 리드를 하는 사람들은 인기를 끌기 위해서거나 책을 더 많이 팔기 위한 캠페인으로서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 역시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 생각한다. JS의 책임자인 Funk에 대한 그의 비판은 사실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일단 그의 글을 통해 나는 그가 JS에 참석하는 일단의 신학자들에게 매우 크게 화가 나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Funk의 발언들을 꼼꼼히 인용하면서 그가 얼마나 형편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를 비난하고 있다. 문제는 그가 학문적인 방법을 통해서 학문적인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 일방적인 비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리터럴하게 성경을 보지 않는 점, 종말론도 실제로 일어날 앞으로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생각한다는 점등이 그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듯하다. 학문적인 방법론들을 책을 팔기 위한, 또는 자신의 인기를 얻기 위한 변변찮은 상술로 (Hucksterism) 본다는 것이 안타깝다.
두 번째 챕터를 읽어야 하나…라는 고민에 휩싸였다. 챕터의 제목마저 심상치 않다. “History Challenging Faith”, 이 시점에서 그의 이력을 잠시 서치해 보았다. Yale에서 New Testament PhD를 하신 분이 왜 이런 글을 썼을까라는 궁금증이 밀려왔다. 나는 이 책의 머리말과 챕터1을 읽으며 이 책의 저자가 성서학에 학문적인 백그라운드가 없는 사람일 것이라 짐작했었다. 나의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으나 이 책이 출판된 이후 Robert J. Miller, Ph.D. (Claremont)와 Johnson이 서로 내용에 대한 비판을 주고 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인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니 안심이 되는 한편 역시 Claremont라는 생각이 든다. (This book is the most mean-spirited one by a scholar I have ever read. Those who believe that academic discourse should debate ideas without personal polemic will, unlike Meeks, conclude that Johnson’s polemical rhetoric disgraces himself rather than his opponents. -Robert J. Miller) 이 분야와 관련된 공부를 하는 모든 scholars와 학문적인 성서학의 방법론들을 모두 비난하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챕터에서 Johnson은 Thiering, Spong, Mitchell, Wilson, Borg, Crossan, Mack, and the Jesus Seminar의 책들을 광범위하게 비판한다. 특히 54-55 페이지에는 앞서 나열한 신학자들의 책에서 발견한 ‘constant traits’ 변하지 않는 특징들을 6가지로 정리하며 비판하고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요약과 커멘트로 정리할 것이다.)
- These authors reject the canonical Gospels as reliable sources for our knowledge of Jesus. (언급한 모든 신학자들은, 신약성경을, 그 중에서도 사복음서를 권위있는 소스로 삼고 있다고 나는 이해한다. 저자가 비판하는 지점은 타당하지 않다. 만약 이 비판이 Q 복음서에 대한 지적이라하더라도 Q의 대부분은 사복음서 자체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 모두 등장하는 내용이라 이 또한 타당하지 않다.)
- These authors reconstruct the historical Jesus without reference to canonical writings outside the Gospels. (존슨은 사복음서 이외의 서신서들에서 17가지의 아이템을 뽑아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을 다 소개하지는 않겠다. 존슨이 발견한 내용들은 자신이 주장하듯 사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내용들이 아니다. 그 내용들은 사복음서에 직접 언급되어 있거나, 상식수준의 유추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면 다 생각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복음서 이외의 서신서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레퍼런스는 존슨이 주장하는 바에 의거해 생각하면 그다지 영향력이 없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2번의 주장 자체가 담지하고 있는 지적은 사실이라면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연구를 할 때, 서신서들에서 유의미한 증거를 찾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서신서들에 등장하는 예수에 대한 언급들은 대부분 십자가 사건 이후의 예수, 이미 신학화 작업이 된, 예수의 모습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골고다 이전의 예수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를 서신서들에서는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 이 주장은 그 존립근거가 약하다 할 수 있다.)
- These authors portray the mission of Jesus and his movement “in terms of a social or cultural critique rather than in terms of religious or spiritual realities.” (존슨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것은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것과 분리된다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어떤 종교도 그것이 태동하고 발전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토양과의 긴밀한 관련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적이고 영적인 것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실체이며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 운동을 논함에 있어, 또한 예수의 메시지를 이해함에 있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해 없이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의 글에서도 사회적, 정치적 비판은 짙게 드러나있다. 그 선지자의 정신은 신약 시대에 요한과 예수의 행보와 메시지에서 또 다시 드러났다. 예수의 메시지는 이 땅의 제국의 힘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맹렬한 선포였으며 이 땅의 제국의 힘 아래에서 굴종하며 착취당하던 사람들에 대한 해방의 메시지였다. 예수의 메시지는 매우 사회변혁적인 메시지였으며 동시에 매우 영적인, 종교적인 메시지였다. 예수의 운동을 이해함에 있어 존슨의 시각은 편협하다 할 수 있다.)
- These authors all have a theological agenda, inasmuch as they “want their understanding of Jesus and Christian origins to have an impact on Christians.” (모든 신학자들은 agenda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이해가 크리스천들의 하나님 이해, 즉 신학적인 포메이션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를 바란다. 위에 언급한 학자들 역시 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연구에 매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다른 사람에 비해서 조금 더 솔직하고 조금 더 용기있다고 생각한다. 존슨은 아마도 이 학자들이 단순히 지적인 호기심만을 가지고 기독교계 전체에 안좋은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이런 일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신약학자로서 이런 말을 들었다면 굉장히 모욕적이라 느꼈을 것 같다. 신학자로서의 길은 그렇게 단순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며 몇 십년을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 These authors assume that “historical knowledge is normative for faith, and therefore for theology” and that the “origins[of Christianity] define [its] essence.” (약간 생뚱맞을 수 있지만, ‘신앙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신앙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꼽자면 ‘이해’와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해’는 단순히 지적인 앎을 포함하며 그것을 넘어선 신비에의 ‘느낌’의 영역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 생각해 보자. ‘경험’은 하나님을 내 삶에서 생생히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인생의 어느 순간에 그러한 하나님 경험을 한다. 신비의 체험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감각적인 신체와 정신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모든 경험은 하나님 경험이라고 하자. 이해와 경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다. 만약 신약학자들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복원과 회귀를 통해서만 우리는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것은 신앙의 작은 부분에 불과한데 그것을 침소봉대하여 사람들을 미혹하지 말라고 비판할 것이다. 신앙은 역사적인 순간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경험이면서도 역사안에서만 경험되는 아이러니를 포함한다. 또 다른 한 가지 지적할 것은 ‘essence’에 대한 오해이다. Origin, essence라는 단어가 지시하고 있는 생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고 방식에서는 심각한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 소위 essentialism, 본질론 또는 본질주의는 모더니즘적인 발상이다.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복원함에 있어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누가 예수의 본질을 정의하는가? 이것이 오리진이라는 결정을 누가 하는가? 백인 중산층 남성의 시각을 벗어난 예수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가 가능하겠는가? 아시안으로서 우리는(나는) 그들이 발견해 놓은 기독교의 origin, essence를 있는 그대로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내가 경험한 예수는 무엇인가? 그 예수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등등의 질문들을 통해 본질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억압적인 기재를 그 안에 포함하고 폭력적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
- Although the authors (except Mitchell) “have some form of identification with Christianity,” their real allegiance is to academia. (뭐 이건 거의 인신공격 수준이 아니겠는가? 누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권한이 있는가? Identification with Christianity 는 어떤 것을 포함할 수 있고 어떤 것을 포함하면 안되는가? 또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존슨이 결정한대로 모두가 따라야 하는 것인가? 존슨은 Christianity와 academy가 서로 반대 편에 서 있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챕터 4, 5에서 역사와 의미 그리고 네러티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존슨은 역사적인 가정이 지적인 허구에 의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일면 맞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을 밝히는 과정을 생각하면 우리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역사적인 사실은 있는 사진을 찍듯이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재구성함에 있어서 증거는 늘 불충분하다. 역사는 컨텍스트 안에서 의미를 가지고 그 의미는 네러티브를 통해서 드러난다. 역사적 네러티브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과 의미는 구분된다. 역사적 예수를 찾는 일에도 역시 역사 신학적인 방법론들을 통해 학계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학문적인 정합성을 따라 역사 재구성의 프로젝트를 하는 일은 엄밀한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는 일과 구분되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은 온전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은 네러티브 안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어떠한 네러티브건 그 안에는 관점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는 일은 이러한 관점과, 의미와 방법론에서만 가능하다.
예수의 부활과 신적인 기적의 관계: 존슨은 예수의 부활사건이 ‘A-history’라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적인 기적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reduce’ 할 수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는 의미에서의 비-역사적 사건으로 신의 개입(intervention)으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Doctrinal Orthodox한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면 역사적인 예수를 찾는 일, 그 네러티브를 재구성해 가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가? 예수를 찾아가는 역사비평적 방법론은 기독교를 파괴할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존슨은 여전히 여기에서도 이분법적인 시각에 빠져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초월과 내재의 모든 면을 다 가지고 설명해야 한다.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십자가는 그렇기 때문에 신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