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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재구성

  • Post category: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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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과신대의 2월 읽기는 역사적 예수의 복원 가능성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한다. 역사적 예수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한 길이다. 본질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역사를 보는 눈은 매우 제한되게 된다. 실체에 선행하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역사 공부에서는 매우 위험한 발상일 수 밖에 없다. 본질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소위 끼워맞추기식 이야기 전개가 불가피하다. 이야기의 앞뒤는 이미 정해져 있고 드문드문 발견되는 증거들을 끼워 맞춰 전체를 구성해 간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의 역사 읽기 방식은 무엇일까? 나아가 포스트 모던 방식의 성경읽기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답하기가 힘들다. 나의 신학이 추구하고 있는 방향이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찾는것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예수에 대한 이해는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를 어떻게 아는가? 어떤 예수를 어떻게 소개 받았으며 어떻게 읽어오고 있으며 어떻게 들었는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예수는 어떠했을까? 그리고 내 안에 재구성된 예수의 이미지는 과연 얼마나 실제 존재했던 예수의 모습에 닮아 있을까? 만약 이런 고민들을 해보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예수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아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은 신앙과 신학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전통적인 신학은 역사적으로 실제했던 예수와 후대의 크리스천들이 이해하는 예수가 다르지 않다고 가르쳤다. 그 사이에 어떠한 간격이 존재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 나열한 질문들을 잠깐 생각해보면 그 둘은 절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된 예수의 네러티브 안에서 진짜 예수를 만나는 일은 간단하지 않은 작업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너무도 중요하다. 무대에 올려져 있는 예수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진짜 예수를 상상한다. 1세기 팔레스타인을 걸었던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해 나의 구세주가 된 메시아를.

넷플릭스의 메시아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속에서만 상상하던 것을 현실화해낸 화면을 보며 잠시 아찔했다. 예수가 이 시대에 다시 온다면…이라는 가정은 그리 새로운 가정은 아니다. 종말론 부분에서 예수가 다시 온다는 개념은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늘 들어 오고 상상은 해 보았으나 눈 앞에 이미지로 보여진 메시아는 적잖은 충격을 나에게 주었다. 예수께서 다시 온다면, 내 눈 앞에,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 나는 그를 통해 어떤 것을 보게될까? 아니면 보려고 할까?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예수에게 투영했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고,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고,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그랬다. 그들은 같은 예수를 보았지만 서로 다른 예수를 그들의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다. 나는 예수에게 어떠한 욕망을 투영하려고 할까? 나는 그를 과연 알아볼 수나 있을까?라는 생각이 내 마음에 휘몰아 쳤다. 잠시 생각해 본다. 이 시대의 예수는 시리아의 난민으로, 홈리스로, 기존 시스템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치광이의 모습으로 보여질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테러리스트가 아닌지 의심할 것이고, 새로운 Warlord가 아닌지 살피려고 할 것이다. 내 안의 예수는 넷플릭스의 메시아를 통해 더욱 생생해진다. 그리고 나는 언제든 그런 예수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며 나의 눈을 다시 닦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