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출처: 파사데나 과신대 페이스북, 김영웅 페이스북
2020년 1월 파사데나 과신대 모임 정리 글.
주제: 성서신학으로 본 ‘과학과 신학 (신앙)의 대화 (과신대)’ – 구약편-1.
교재1: Ernst Troeltsch 저, “Religion in History” 중 Chapter1. Historical and Dogmatic Method in Thelology (1898) (신웅길)
교재2: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 저, “The Bible Unearthed” 중 Prologue, Introduction, and Chapter1-5 (Chapter1-2: 전계도, Chapter3: 이선주, Chapter5: 임택규, 나머지: 김영웅)
교재3: James K. Hoffmeier and Dennis R. Magary 저, “Do Historical Matters Matter to Faith?” 중 Chapter4. These Things Happened: Why a Historical Exodus is Essential for Theology (이동우)
장소: 490 E. Walnut St. Pasadena. 풀러신학교 2층 컨퍼런스룸.
시간: 2020년 1월 22일 수요일 저녁 6시 30분 – 9시 30분.
참석자: 신웅길 (leading), 이선주, 전계도, 신폴, 임택규, 박찬민, 이재석, 김영웅, 이상 7명.
비고: 이동우 부득이한 불참. 박찬민 첫 참석. 이재석 예고 없는 참석. 이선주 김밥 제공. 신웅길 장소 제공. 전계도 모임 전체 녹음 담당. 김영웅 모임 전체 정리 글 담당.
전체 모임 요약 및 정리.
2018년 여름 첫 모임을 가진 이래 2019년 가을까지 한 달에 한 번씩 ‘파사데나 장로교회’에서 모인 ‘파사데나 과신대’ 모임은 ‘과학과 신학 (신앙)의 대화’라는 주제로 현재까지 논의된 것들의 기본적인 전체 숲을 훑는 과정이었다. 다른 북클럽보다 뒤늦게 시작한 파사데나 과신대 모임은 한국 과신대의 흐름과 상황을 파악하고 발을 맞추고자 한국 과신대에서 선정한 필독 도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창조과학의 기원과 역사, 문제점과 한계점 등을 공감하고, 동시에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의 의견을 나누며 ‘과학과 신학의 대화 (hereafter, 과신대)’가 필요한 이유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1년이 지난 2019년 여름까지 매달 성실하게 모임을 지속해왔지만, 참석인원 모두는 그 즈음 마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느낌을 조금씩 받기 시작했었다. 그 동안 모임에서 우리는 각개전투에서 벌어지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창조과학과의 마찰로부터 한숨 쉬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를 느끼기도 하며, 모두가 같은 페이지에 있다는 공감을 충분히 받아왔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뭔가가 부족했던 것이다. 우리는 창조과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치 기독교 신앙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끼는, 즉 주로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의중을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방법만이 아닌 정서적이고 심리학적인 방법으로도 통찰해 보려고 노력했었다. 창조과학의 객관적인 문제점과 한계점을 알려주었을 때의 그들의 상태와 반응을 ‘의도적 거절’인 것 같다는 새로운 용어까지 만들어내며 활발한 토론이 지속되었지만, 그 활발했던 기간도 1년 남짓의 시간이 지나니 어딘가 모르게 정체의 기미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대로 모임을 지속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지속이 그다지 의미가 없을 거라는 암묵적인 결론에도 다다랐었다. 우리에겐 동기부여가 될만한 뭔가 새로운 도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과신대’라는 기초적인 숲을 충분히 관찰했다고 판단했다. 다음 여정은 그 숲 안으로 들어가 나무를 자세히 관찰하고 알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우린 가장 먼저 참석 인원의 전공을 살펴보았다. 성서신학, 조직신학, 생물학, 컴퓨터공학, 주로 이렇게 네 분야였다. 물론 궁금한 타 분야의 외부강사를 초청하는 방법도 가능했지만, 그러기에 앞서 우리 내부의 전공분야를 ‘과신대’라는 숲 안의 나무로 삼고 살펴보는 게 우선순위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각 분야 당 4개월 안팎에 걸쳐 조금은 깊게 공부해나가자는 의견에 마음이 모아졌다. 그 시작이 2020년 1월이었고, 성서신학이 첫 타자였다.
성서신학이라는 나무를 공부하는 여정은 성서의 역사성 문제를 살펴보는 일로 정해졌다. 1월 22일에 있었던 첫 모임에서는 구약성서, 그 중에서도 족장시대부터 출애굽, 가나안 정착, 이스라엘 왕조의 황금기,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정체성과 신앙을 형성하는 인물과 사건들에 대한 부분의 역사성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이 글은 모임 전체를 녹음한 뒤, 그 녹음 파일을 다시 들으며 김영웅이 요약 및 정리한 것이다. 모임은 세 가지 교재 요약을 담당한 각자의 능동적인 참여로 이루어졌으며, 교재 요약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토론도 같이 이루어졌다. 약 3시간 가량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되었던 진지하고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교재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번 성서신학 여정의 길잡이인 신웅길 교수가 전체 여정을 간략히 소개하며 각 교재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앞으로 4-6개월에 걸쳐 매달 모일 성서신학의 눈으로 본 과신대는 성서해석에 있어서의 역사성 문제를 다룰 것이다. 첫 모임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교재를 다루는데, 첫 번째 교재는 성서해석의 두 가지 방법론 (역사비평적 방법과 교리적 방법)을 비교한다. 저자는 근대 이후로 가장 중요한 성서해석 방법론으로 대두된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사용하지만, 이 방법론은 기존 교회에서 사용해온 방법론과 많이 상치된다. 역사성을 따질 성서본문이 많지만, 두 번째 교재를 택한 이유는 가장 먼저 구약에서 족장시대부터 출애굽, 가나안 정착, 왕조, 즉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정체성과 신앙을 형성하는 사건들에 대한 부분을 다루기 위해서다. 저자는 고고학적인 방법을 기본으로 하여 이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입장이다. 세 번째 교재의 저자는 비록 고고학자이지만, 고고학적인 반박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이 사건들의 역사성이 왜 중요한지 주장한다. 두 번째 교재가 성서의 역사성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이라면, 세 번째 교재는 성서의 역사성을 옹호하며 긍정적인 입장에서 써진 책이다.
교재1 요약 및 정리.
저자의 기본적인 주장은 성서해석의 새로운 방법론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교리적 방법을 오래된 방법, 역사비평적 방법을 새로운 방법으로 구분한다. 역사비평적 방법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저자는 교리적 방법론의 단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교리적 방법론은 계시에 대한 강력한 권위를 부여하여 모든 해석의 시작점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역사비평적 방법론이 가져야 할 세 가지 특징적인 원리를 주장한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방법이다.
첫 번째, Criticism의 원리: 성서의 “모든” 사건을 “예외 없이” 의심하고, 그 가능성의 정도로써 역사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두 번째, Analogy의 원리: 과거-현재-미래 상관없이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들이 똑같은 원칙과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원리이다. 특수성과 예외는 용납하지 않는다. 세 번째, Correlation의 원리: 모든 종교현상을 포함해서 모든 사건들은 인과관계를 가진다는 원리이다. 인과관계를 초월하는 사건이나 인물은 용납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세 가지 원리에 입각하여 모든 신학을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앙의 대상이 사실적 (역사적) 대상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 분리가 옳은지, 두 대상이 하나인지, 아니면 대립되는 것인지, 혹은 양립 가능한 것인지는 토론 대상이 되겠지만, 저자는 둘을 일단 분리한다. 이렇게 분리하여 나타나는 신학 양상이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이라 볼 수 있다. 기독교 특유한 신학이 아닌 종교로서의 신학을 말한다.
저자는 세 가지 원리에 입각하여 교리적 방법론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한다. 성서해석의 시작점이 의심이 아닌 명료한 계시라는 점은 역사비평적 방법론으로 볼 땐 검증 불가능한 시작점일 뿐이다. 이를 옳거나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시작점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의심 없이 100% 명료한 시작점을 전제하기 때문에 첫 번째 원리인 Criticism과 상치된다. 또한 기독교의 독특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두 번째 원리인 Analogy에 상치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인과관계를 초월하는 분이라고 상정하기에 세 번째 원리인 Correlation에도 상치된다. 그러므로 교리적 방법론은 문제가 많고,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성서해석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학계의 주류는 역사비평적 방법 쪽, 교회는 상대적으로 교리적 방법 쪽에 치우쳐왔다. 그러나 이제는 역사비평적 방법 또한 힘을 많이 잃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방법론 안에서도 여러 가지 수많은 상충된 주장들이 나와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를 정도로 혼돈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학계는 교회의 신앙에 기반해서 연구를 수행하지 않으며, 교회는 학계의 주류 연구 방향을 따르지 않는다. 저자는 앞서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무신론자의 입장인데, 그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계시를 부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성서신학 안에서는 교리적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학자는 신앙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신앙고백과 상관없이 연구하는 조직신학은 SDL 학회, 신앙고백을 전제로 연구하는 조직신학은 ETS 학회, 현재 이렇게 두 학회로 크게 나눠져 있다. 재미난 것은 똑같은 성서본문을 가지고서 정반대의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이렇게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는 학문이 아닌 신앙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교재2 요약 및 정리.
Prologue: In the Days of King Josiah.
성서에 기록된 역사적 이야기는 기적적인 계시가 아니라 인간 상상력의 뛰어난 결과 (epic saga)다. 성서는 역사기록이 아니라 문학작품으로 읽어야 한다. 모세오경은 유대 요시아 왕의 종교 정화운동 때 쓰였다. 이 책은 고고학적인 입장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성서의 탄생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전설에서 역사를 분리하는 것이 목적이다. ‘역사’란 고고학적인 검증 결과로만 판정된 결과물로 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파괴가 아닌 탈구축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역사가 무엇인가?” 일지도 모른다. 과연 고고학적으로 검증된 결과물만이 역사인가, 아니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역사인가 하는 점이다.
실제 사건은 크든 작든 어떻게 해석되든 상관없이, 어쨌거나 사실로써 있긴 있어야 하지 않냐고 물을 수 있다. 그 이후의 해석은 과장, 축소 등등의 수정이 가해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일까. 예를 들어, 최소한 예수라는 인간은 실제로 존재했어야 하지 않을까. 물 위로 걷든 기적적으로 치유하든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래야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그래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만약 예수 자체가 허구적 인물이라면 기독교 신앙도 모두 무너져 내리고 허구일 뿐이지 않을까.
Introduction: Archaeology and the Bible.
고고학적인 발굴은 성서의 내러티브가 구체적으로 모두 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했다. 반대로, 성서의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어떤 특정한 시대나 특정한 방법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몇몇 유명한 사건들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고고학은 성서의 역사 재구성에 도움을 준다.
고고학적인 발굴의 초기 목적은 창조과학의 초기 목적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내러티브를 기본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고고학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들을 찾기만 하면 될 거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성서의 핵은 이스라엘의 기원과 그들과 하나님과의 지속된 관계를 묘사하는 거대서사에 있다. 다른 고대근동신화와는 달리 땅에서의 역사에 굳게 기반을 두며, 이스라엘백성이 그 주인공이며, 세계의 운명도 그들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쓴 게 아니라, J (Yahwist), E (Elohist), D (Deuteronomy), P (Priestly source) 등의 자료들이 합쳐져서 오랜 시간에 걸쳐 편집된 모음집이며, 기원전 7세기 말 요시아 왕 종교개혁 운동 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염원과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역사적 환경 아래 써진 문학작품이다. 그러나, 성서의 유명한 내러티브들의 역사성이 없다 하더라도 고대 이스라엘이 진실한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다만, 고고학 증거들을 기반으로 하여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여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모세오경 기록 시기를 요시아 왕 때로 보지만, 다른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 귀환 직후로 보기도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더 늦게, 헬라 왕국 시기로 보기도 한다. 다양한 입장들이 있다. 신구약 중간기, 헬라 왕국 때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이스라엘의 회복이었다. 신명기적 역사관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다. 이스라엘의 회복과정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성서의 기록 시기를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Chapter1: Searching for the Patriarchs.
창세기 팩트 체크 같은 본문이다. 족장들의 긴 수명이나 아브라함의 이동에 대한 고고학적 흔적이 없다. 또한 아람 종족이나 에돔 족속의 존재 증거도 고고학적으로 모호하다. 여러 고고학적 증거와 성서에 기록된 시기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Chapter2: Did the Exodus Happen?
출애굽기 팩트 체크 같은 본문이다. 이집트 기록과 성서에 기록된 역사적 시기가 상충된다. 여러 고고학적 증거들에 의거하면 출애굽기가 이집트 26왕조, 기원전 7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오히려 요시아 왕 때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고고학적 증거는 전체의 아주 일부분일 뿐, 전체가 아니기에, 확대과장된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다시 말해, 저자가 말하는 고고학적 증거라는 것도 결국은 저자가 가지고 있거나 바라는 관점이 투영된 해석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만 보면 저자의 필력에 압도되는 면이 있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거의 모든 항목들을 반박하는 책이 있다. Kenneth Kitchen의 책, “On the Reliability of the Old Testament”이다. 즉, 부분적인 자료들로 전체를 해석하는 건 정합성의 문제로 언제나 한계가 있으며, 그 때문에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케 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해석에서 옳고 그름의 잣대는 객관적일 수가 없다. 허구와 신학적 의도의 분별은 언제나, 어쩌면 영원히 어려운 일이다.
교리적 방법론에서는 자신의 믿음과 반대되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나와도 여전히 믿음이라는 이유로 그 객관적인 증거들을 무시하거나 축소시키는데, 증거들이 계속 많이 나오게 되면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궁금하다. 혹시 그래도 계속 믿음이라며,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자료에 무관하게 근본주의적으로 문자에만 의존하여 성서의 역사성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과연 이들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교리적 방법론을 다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교리가 과연 완전무결한 것인지, 완벽해서 변경이나 수정이 불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혹이 남는다.
Chapter3: The Conquest of Canaan.
가나안 정복에 대한 여호수아서의 내러티브가 고고학적 증거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증거들을 보여주는 단원이다. 여러 신뢰도가 높은 이집트 자료에 의거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존재가 있기는 있었다. 여리고-아이성-네 개 부족 연합-가나안정복의 순서가 성서에서 기록하는 순서와 일치하는 것처럼 여겨졌던 이유는 올브라이트의 해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고고학적인 증거들은 반대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기원전 1550-1150년의 후기청동기 시대의 이집트의 자료를 비롯하여, 가장 강력한 증거인 Tell el Amarna letters 점토판은 확실하게 가나안은 이집트의 지배를 받는 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으며, 가나안 국가들이 이스라엘로부터 침략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 가나안 자체는 요새화될 필요가 없었고, 실제로 병약한 곳들이었으며, 성벽도 없었다. 제국 이집트가 관리하고 있는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복설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가나안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나라가 이집트였다는 점을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앞장서서 정복한 가나안이라는 국가들의 배후에는 강대국 이집트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가나안을 치면 이집트가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고학적 불일치를 이유로 여호수아서를 새롭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적 변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텍스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컨텍스트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성서는 이스라엘 땅을 중점적으로 기술하지만, 고고학적으로 후기청동기 시대를 보려면 가나안 경계에서 지중해 동부까지 넓게 봐야 한다. 당시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두 제국이 있었으며, 키프로스나 미케네 같은 강대국들도 존재했었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는 이러한 번영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런 몰락과 폭동을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대격변의 이유 중 하나를 학계에서는 해양민족이라는 존재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해양민족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가설은 있지만, 아직도 가설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가나안 정복에 대한 하나님의 폭력성을 이해하는 부분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의 해석이 존재한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을 때에도 늘 걸리는 문제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린아이까지 몰살해버리라는 명령이 과연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는 그분과 동일한 분이신지에 대해서 의혹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약 고고학적인, 비록 파편적인 증거들이지만, 자료들이 옳다면, 가나안 정복은 허구인 셈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늘 고민했던 가나안 정복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폭력성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저자의 단점은 고고학적인 부분적 단서만으로 확대 해석하여 자기가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즉, 저자가 주장하는 역사성은 고고학적인 증거들에 기반한 실제 역사가 아니라, 어쩌면 저자가 원하는 대로 써진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Chapter4: Who were the Israelites?
앞의 1-3 단원에서는 족장 시대부터 가나안 정복, 즉 창세기부터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사건들의 역사성을 따져봤다면, 이번 단원에서는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묻고 따져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창세기 출애굽기 여호수아에 이르는 거대 내러티브에서 찾지만, 과연 그게 역사적인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을 부인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외부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족이 아니라 원래 가나안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일 거라는 가설을 주장한다. 만약 여호수아서의 내러티브가 역사성을 가진다면, 여호수아가 이끌고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농경 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광야 2세대들인데, 가나안에 들어와 농경생활하던 가나안 민족들을 모두 몰살해버리고 난 이후 어떻게 농경생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합리적인 질문이 가능해진다.
저자는 가나안의 경제적인 불균형 때문에 일부 소수의 반역소작농들이 산악지대로 옮겨가 평등사회를 만든 게 바로 이스라엘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저자의 말대로 경제적으로 착취당한 자나 반역소작농들이 이스라엘의 시작이라면 현재 유대인들은 굉장히 불쾌할 거라 예상된다. 그들의 정체성의 뿌리가 흔들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모세와 여호수아에 인도 하에 홍해도 건너고 요단강도 건너고 여리고성도 무너뜨리며 우상을 섬기던 가나안 토착민들을 몰살해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예배하는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시작이어야만 하는데, 그게 아니라 반역소작농들과 같은 가나안 토착민 중의 일부가 그들의 시작이라고 하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지 감히 상상도 안 갈 지경이다.
농경-유목 생활의 패턴 변화에 대한 고고학적인 증거자료들과 광범위한 산악지대 발굴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주된 어려움은 타 종족과의 전쟁이 아닌 지형과 환경, 즉 먹고 사는 문제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미 외부 유입으로 말미암은 가나안 정복을 허구라고 보는 저자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전쟁이나 정복 따위가 아닌 그야말로 굶주림과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문제였다는 주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말을 다시 하면, 초기 이스라엘의 생성은 가나안 문화의 붕괴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고학적인 증거는 가나안 정복이라고 알려진 시기에 산악지대 인구의 갑작스런 증가를 알려주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도 모르는 상태다. 그들이 사용하는 토기나 도자기 등의 문양의 차이는 곧 물질문명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들의 분석으로 미루어 보아 그 증가된 인구 집단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지역의 그것들과 다른 문양을 사용했던 증거도 있기 때문에, 어쨌거나 알 수 없는 새로운 집단이 산악지대에 존재했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집단이 새로 유입된 사람들인지 원래 가나안에 있던 일부의 사람들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저자는 후자를 주장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전자를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는 돼지 뼈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나름 구별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는 된다. 코펜하겐 학파를 위주로 한 학자들은 ‘이스라엘은 없다’라는 주장까지 한다고 한다. 그들은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난 것 한 가지는 비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원을 왈가왈부하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도 사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통일되게 알고 있지 않지만, 타국인들이 자기 나라의 기원과 정체성을 가지고 여러 가설을 세우고 서로 논쟁하는 모습은 어찌 보면 참 기가 막힌 노릇일지도 모른다.
Chapter5: Memories of a Golden Age?
이 단원에는 다윗과 솔로몬 왕의 황금시대가 실재했는지 고고학적인 증거들로 추정하며 그 역사성을 다시 재검토해보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성서 미니멀리스트들의 입장은 다윗이 아더왕보다 덜 역사적 인물이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그만큼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황금시대라고 할만한 화려함과 강성함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특히 솔로몬이 지은 성전 등의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다고 한다. 물론 합리적인 반박은 가능할 것이다. 로마시대 때 전부 파괴되었기 때문에 없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다윗 왕국의 실존성을 ‘House of David’라고 써진 비문을 Tel Dan에서 발굴해서 확인되었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뿐 아니라 모압왕 메샤의 비문에서도 다윗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적어도 다윗이 실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다음과 같은 합리적인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산악지대에 살고 강대국도 아닌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집트의 속국이었던 가나안 도시들을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었을까? 만에 하나 그랬다 하더라도 왜 기록이 없는 걸까?” 여기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은 후미지고 낙후된 고지대 유목 마을일 뿐이지만, 성서에서처럼 황금시대로 기록된 것은 신명기적 역사관의 반영이며, 신학적인 희망이 담긴 허구라고 말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증거들을 우린 너무 확신해서 믿어도 안 된다. 언제나 파편적이라 불충분한 자료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거기엔 해석의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처럼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소설을 성서이라고 믿고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 증거로 추정한 것들을 가설의 합리적 가능성 제시 정도로 끝내야지 그것만이 옳다고 우기면 안 된다.
교재3 요약 및 정리.
저자는 고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인 방법이 아닌 신학적인 방법으로 성서의 역사성을 옹호하는 입장이다. 교재2가 성서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입장이었다면, 교재3는 옹호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과연 저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만약 출애굽의 역사성이 허구라면, 그 이후 기독교 신앙 형성에 중요한 많고 많은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역으로 출애굽의 역사성이 거짓일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허구에 불과한 출애굽으로부터 기인했겠냐고 되물으며 그건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출애굽이라는 사건 하나만으로도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하여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되는데, 어찌 그 출애굽 기사가 다 허구일 수 있겠냐고 신학적으로 따지면서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의 신앙은 무엇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은혜로 받았다는 믿음이란 그 실체가 무엇일까. 성서의 역사성이 기반이 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역사성을 인정해야 하고, 또 어디부터는 허구여도 되는 것일까. 성서가 역사책도 아니고 과학책도 아니며 신학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책이라는 합리적인 입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만약 그 신학적 메시지가 순수한 허구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뿌리 채 뽑혀지진 않을까. 아니면 그런 것들이 아무래도 좋으니 변함없이 굳건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신앙의 근간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지 한 번 쯤은 곰곰이 따져봐야 할 것이다.
다음 모임은 2월 19일 수요일 저녁 6시 30분에 풀러 신학교 2층 컨퍼런스 룸에서 동일하게 모인다. 주제는 “예수의 역사성”이다. 교재는 새물결플러스 스펙트럼 시리즈 1인 “역사적 예수 논쟁”과 Luke Timothy Johnson 저, “The Real Jesus”, 이렇게 두 권이다. 진지하게 관심 있으신 분은 언제든 먼저 연락하시고 참관하셔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