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무모함 I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 신에 대한 믿음, 교회가 함께 고백하고 받아들인 교회의 가르침, 즉 교리와 신앙고백에 대한 믿음, 경전, 즉 성경에 대한 믿음, 그리고 자신이 속해있는 교회와 교단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 등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 뿐 아니라 모든 종교인들에게 자신의 종교에 대한 믿음은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될 것이다. 흔히 자주쓰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그렇기에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믿음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이다. 신에 대한 믿음은 말이 간단하지 사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역사를 아우르는 오래되고 장대한 개념이다. 개인의 믿음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 동안 있어 왔던 역사안의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도 중요하다. 그들의 믿음은 현재 나의 믿음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교회의 교리는 역사 안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신 경험, 그리고 그들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과 신앙의 고백은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또한 사회와 무관하게 존재한 것이 아닌 수 많은 사람들의 네러티브와 고민 속에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이다. 믿음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부정할 때 우리는 변질된 믿음을 만나게 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신천지라는 종교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기독교인들이라면 그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기독교회에 있어서 신천지는 마치 암적인 존재이다. 교인들에게 몰래 접근해서 거짓으로 그들을 선동해(물론 자신들은 그것을 진실이라 믿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포섭한다. 그런 사람들의 수를 늘이고 점점 그런 사람들로 교회를 채워 결국에는 교회 전체를 장악한다는 무서운 전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그런 공격적인 선교의 방식은 기존 교회에는 무척 두려운 방식이다. 소위 게임의 룰을 벗어난 무규칙 격투기 같은 존재이다. 거짓을 말하지 말라는 윤리적은 가르침이 신천지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 보다 더 중요한 영생을 얻기위해서는 거짓된 행동을 하는 것을 권장한다. 신천지가 얼마나 교리적으로 잘못되었는지를 나는 이 곳에서 밝히고 싶지 않다. 그 교리를 듣고 그것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그 종교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는 아무리 말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테니까. 그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아마도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신천지 교인들은 아마 자신들이 믿는 종교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만희라는 사람들을 예수로 믿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성경적인가? 그것이 올바르게 성경을 해석한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들이 믿고 있는 교리와 상관 없이 물을 수 있는 질문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성경에 어떠한 권위를 두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자신들을 예수교회라고 부르고,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인정이 상당하기에 이상한 해석을 통해 사람들을 호도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대부분 한국교회는 성경에 매우 높은 권위를 주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높이 인정하고 다른 해석을 보여주는 것이 포교활동에 유리했으리라 생각한다. 성경에 권위를 주는 것은 믿음의 중요한 영역이다. 그런데 성경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성경의 해석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해석되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서 의미를 가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문자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그래서 성경에서 발견하는 윤리적인 가르침에 천착하고 심지어는 자신들이 믿는 교리에 어긋난 문자주의적인 자구적 이해를 꾸역꾸역 받아들인다. 또는 그런 이해 안에서 자신들이 믿는 교리를 바꾸기도 한다. 결국에는 앞과 뒤가 맞지 않는 교리를 갖게 되거나, 교리와 성서해석이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교회의 교리와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한데, 이것이 성서해석에 기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같은 신앙고백을하는 사람들은 성서를 그 신앙고백의 눈으로 보기로 동의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여러가지 분파가 존재하는 것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백이 다르기 때문이다. 범위를 좁혀보자. 가톨릭과 정교회를 제외한 개신교에서 신앙고백의 차이를 가지고 구분되는 교단은 여러개가 존재한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개신교회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시작된 장로교회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면 된다. 내가 속한 미국장로교회 PCUSA는 현재 12개의 신앙고백을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분명하게 그 신앙고백서들은 성서에 우선하지 않지만 성서해석의 기준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 신앙고백이 존중받지 않는 교단에서는, 또한 그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자각하지 못할 뿐더러 강조하지도 않는 교단에서는, 권위있다고 여겨지는 몇몇 사람들의 성서해석이 주류의 성서해석방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공부하지 않고 남의 설교를 표절하거나 무단인용하며 그 해석의 틀까지도 함께 가져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해석의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너무 편협하다는데에 있다. 한 교단에 속한 목사들이 함께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해석의 눈을 따라서 각자의 컨텍스트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여러가지 해석들의 건강한 자정작용을 불러온다. 그러나 경직되어 있고 닫혀 있는 수직적 문화의 한국교회 안에서 주류로 자리 잡은 해석의 방식과 다른 해석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다른 해석을 해낼만한 능력을 갖추려면 상당한 노력을 해야하는데 (성서학, 석의방법론, 성서학회, 신학학술대회에서 발표되는 최신 연구들, 학술지 업데이트, 세계 신학계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흥미로운 논쟁들, 조직신학적 이해, 한국에서 별 관심이 없거나 공부한 사람이 별로 없어 가르치지 않는 조직신학의 최신 분야들에 대한 이해, 연구) 애초에 한국 교회는 그런 것을 위해 노력할만한 세팅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못하다. 한국의 신학교의 커리큘럼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겠지만, 한국 신학교에서 신학적인 소양을 제대로 갖추어 나오는 목회자는 매우 드물다. 신학생들은 신학적인 도전을 통해 새로운 사고를 하는 방법을 배우기보다 교회에서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담임목사, 소위 영향력있는 큰 목사들의 성서해석을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답습하려고 한다. 아마도 그것이 살아남는 방법이겠지만, 그것이 잘 살아남는 방법인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성서해석은 애초에 단추가 잘못 끼워진채로 유지되어 오거나, 방향을 바꾸기에는 너무 거대한 흐름이 되어 방향을 바꾸기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신천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조목조목 짚어내며 설명할 수 있는 개신교인이 얼마나 될까? 아니면 목사들은 어떨까?
원래 이 글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상황에 예배를 강행하는 것을 믿음이라 믿고 있는 신천지 신자들과 한국 개신교회를 향한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였다. 그런데 쓰다보니 이렇게 글이 길어졌다. 이 부분은 다음 글에 이어서 쓰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