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성서정과가 무엇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성서정과I과 성서정과II를 통해서 설명했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글 말미에서 밝혔던 것과 같이 성서정과/성서일과를 사용하는 유익함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나는 지난 약 5년간 내가 하는 모든 설교를 성서정과를 따라 준비했다. 나의 경험상 성서정과를 사용하는 것의 유익함이 그 단점에 비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특히 더 그렇다. 이제 몇가지 유익함에 대해서 말해보려 한다.
- 성경을 더욱 다채롭게 보고 다루게 된다.
- 교회력에 따라 설교를 준비할 수 있다.
-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 목사의 개인적 사심에 따라 설교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 1년 또는 3년까지의 설교 일정을 미리 만들어 놓을 수 있다.
- 성경을 다채롭게 다루게 된다는 말은 성서정과/일과를 사용함으로써 4개 복음서를 기반으로 구약의 역사서, 선지서, 시편의 말씀과 신약의 서신서의 말씀까지 한 주에 정해져 있는 4가지의 말씀을 골고루 다룸으로써 균형있는 성경읽기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이 성서정과를 따라 설교를 하게 되면 3년 동안 성경의 거의 모든 책들을 한 번 읽고 설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설교자에게 유익이 될 뿐 아니라 그 설교를 듣는 성도들에게도 유익이 된다. 보통 설교자들은 자신들이 익숙한 책, 소위 본인에게 꽂히는 책이나 구절 위주로 설교를 하게 된다. 이것은 설교자들을 탓하기 보다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한계라 이해하는 것이 좋다. 사실 성서정과를 따라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설교자에게는 큰 부담이다. 자신이 전에 준비해보지 않은 구절, 깊이 묵상해보지 않은 구절들을 맞닥뜨려 일주일내에 그것을 풀어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숙제가 매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어 표현으로는 ‘totally worth it’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성경을 골고루 보지 않고 편식하는 습관을 갖은 많은 설교자들은 늘 익숙한 구절, 익숙한 신학적 사고의 패턴만을 사용해 말씀을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말씀 가운데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골고루 드러내기 보다는 자신에게 꽂힌 늘 같은 부분만을 드러내게 제한하게 될 수 있다. 그렇게 한 설교자의 설교는 메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늘 같은 이야기, 늘 같은 신학적 사고의 패턴만을 반복하는 것은 ‘차이’를 가져오지 못하고, ‘차이’가 없는 ‘반복’은 지루할 뿐이다. (들뢰즈) 신학적인 첼린지를 스스로 받지 못하는 설교자는 익숙하고 변화없는 자신의 생각의 틀에 갇혀 버리게 된다. 그 신학적 틀을 깨고 나오지 못하면 새로움은 없다. 하나님의 다채로우심, 하나님의 다양성을 설교를 통해서도 풀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적어도 노력은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3년 이라는 시간을 통해 성경의 책을 한 번씩은 읽고 그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씨름한다면 설교자로서 더불어 신학자로서의 개인적 역량은 성장할 수 밖에 없다. 익숙하지 않은 책, 구절을 상대하며 불편함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리고 누구의 설교를 베끼거나 말도 되지 않는 출처 불분명의 예화들을 짜깁기 해서 기껏해야 도덕적인 삶에 대한 교훈을 준다거나(도덕적인 삶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니, 인간의 도덕적 삶 이상의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설교를 저질의 만담식으로 격하시키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다면 성서정과를 사용해 설교할 이유가 충분하다. 설교는 예화집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 설교에 예화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화가 그 말씀이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님을 가리게 되거나,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들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원어 성경을 직접 읽는데 시간을 투자하고, 3개 이상의 커멘터리 (성서주석)를 공부한다. 성서구절이 드러내는 의미와 그것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 해석, 그 구절을 통해서 이 회중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성령님의 말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설교자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중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의미와, 해석과 의도에 맞지도 않는 인간의 교훈을 주는 예화를 찾기위해 인터넷을 헤메는데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설교를 듣는 회중은 준비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고 공부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지 않고서는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 수 없다. 목사의 말도 안되는 성서 해석과 메너리즘에 빠진 저질의 신학적 해석의 틀에 자신을 가두고 맡기지 말아라. 스스로 노력하고 길을 찾는 시도를 쉬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화하기 쉽게 그냥 받아 먹을 수 있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읽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당신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알면 좋겠다. 성경의 말씀은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의 권한은 목사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성경을 붙들고 앉아 있는다고 (소위 면벽수련) 해서, 성경을 50독 했다고 해서 해석의 능력이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신학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올바른 신앙의 노선과 진지하고 성실한 신학적 트레이닝이 함께 만날 때, 좋은 설교가 나오고 좋은 교회가 탄생한다.
다음 글에서는 교회력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