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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정과를 사용하는 유익함에 대해서 II

  • Post category:Ho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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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는 성서정과를 사용함으로써 얻는 유익함 중 첫번째로 성경을 다채롭게 볼 수 있게 된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글 말미에 밝힌 것과 같이 두번째 유익함, ‘교회력에 따라 설교를 준비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2. 교회력에 따라 설교를 준비할 수 있다는 점이 왜 장점이고 유익함이 되는지 느낌이 잘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특정한 몇몇 절기들, 예를 들면, 부활절, 성탄절과 같은 절기는 지키지만 1년을 교회력에 따라 교회전체의 일정이 움직이거나 매주, 매시즌의 메인 theme이 교회력에 따라 지켜지는 경우는 내 경험상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교회력보다는 교회가 정한 그 해의 목표라던지, 그에 걸맞는 프로그램 위주로 교회의 시간이 흘러갔던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또는 담임목사의 의식에 흐름에 따라 정해지는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교회력은 그레고리력이 1월에 새해를 시작하는 것과는 다르게 성탄 4주전인 대림절의 첫주가 시작할 때 새해를 맞는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그 때 새해기분을 내며 전혀 다른 시즌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삶에 있어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은 설레는 기분으로 연말과 새로운 시작이 공존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또한 기다림과 단절/연결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이 신학적 주제는 “같으나 같지 않다.”는 매우 이상하지만 신학적으로 말이 되는 문장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러하셨듯 말이다. 단절과 연결은 우리를 새로움으로 인도한다. 그 새로움을 우리는 늘 기대하는 것이고 우리의 한계지워진 맥락의 상황화에 붙잡혀 빼앗겨버린 상상력이 그 힘을 발휘하는 단초가 된다. 새로움과 상상력은 우리를 설레게 하는 아름다움이다.

그렇게 시작한 교회력의 한해는 에수의 수난을 기억하는 사순절을 지나 Holy Week (고난주일보다는 Holy week이 더 나은 표현같다.)을 맞고 부활절로 이어진다. 성령강림절과 이후 시기가 뒤를 잇는다. 그리고 중간중간 특별한 일들을 기억하는 주간들이 들어있다. 이는 교단마다 조금씩 다르게 정해진다. 이러한 교회력은 거의 모든 기독교의 분파들이 함께 공유하고 지키고 있다. 가톨릭, 동방정교회, 개신교 (장로교회, 감리교회, 루터교회 등) 의 거의 모든 기독교 교회들이 이 교회력을 따라 일년을 지낸다. 교회력을 따르는 일은 기독교인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이 시간이 의미없이 표류하는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우리의 삶에서 실현되는 삶의 주기인 것을 때닫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활절과 크리스마스가 되어서 설레고 왠지 기뻐서 좋은 것 때문이 아닌,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맞추어진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하는 모든 선배 신앙인들과 동시대의 신앙인들이 함께 이 거대한 시간의 흐름의 주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 가운데 이루며 살려 노력했고 또한 노력해 가고 있는 것에 동참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원자화된 개인으로서 파편화된 존재가 아닌, 의미있는 시간을 살고 있는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사는 삶을 깨닫게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교회력은 우리가 바로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신앙의 일상성을 깨닫는 일은 위대한 일이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에 연결된 자신을 깨닫는 것 또한 위대한 일이다.

교회력에 맞추어 설교를 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교회력은 하나님의 영원이 세상의 일시적인 시간과 만나는 위대함을 우리가 볼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위대한 깨달음을 잊지 않게 해주는 일이다. 자꾸 리마인드 시켜주는 것이다. 신앙은 기억하는 일이다. 반복되는 시간의 structure 안에서 그 기억은 더욱 선명해 진다. 설교는 그 기억을 remind 해주는 일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반복되는 시간은 없다. 우리는 한 번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살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의 structure는 신앙의 일상성을 만드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다음 글에서는 3번째,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참하는 일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