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1-7
1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3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4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5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6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COVID-19,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미국내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주일예배를 모여서 보지 않고 온라인으로 대체하거나 주차장 예배, 또는 6 피트의 간격을 유지한 대형을 만들어 야외에서 드리는 예배 등 창의적인 방식으로 바꾸고 있다. 각자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적절한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그들의 종교의 자유를 추구하는 권리와 사회의 공익이 심각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상황에서는 한 개인이 종교의 자유를 추구함이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다. 물론 신천지와 같이 그 존재자체가 사회의 악인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에 종교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생기는 갈등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한 개인 또는 단체의 종교의 자유를 추구함이 사회전체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아주 특수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예배라는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행해지는 형식, 즉 특정한 한 장소에 한 시에 불특정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구분해야 한다. 한 사람의 바이러스 보균자가 불특정 다수를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감염시킬 수 있고 그것의 연쇄적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열성있는 믿음으로 막을 수 있거나 깊은 영성이 차단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31번 확진자 이후에 바이러스의 확산 추이가 얼마나 변했는가를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몇몇 기사를 통해서, 여전히 사람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이 한국에 적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물론 미국에도 그런 교회들이 있다. 그들 역시 사회적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기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전히 예배를 강행하고 있는 한국의 교회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예배는 ‘구약시대 때부터 이어져 온,…쉰 적도 없고, 쉬면 안된다.’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는데, 이는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 자체의 문제와 이어져 있다. 예배가 무엇인가는 매우 신학적인 질문이고 답 역시 신학적으로 되어야 한다.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다시 쓰도록 하겠다. 더 정확히는 한국 개신교인들과 제사라는 주제로 글을 써볼까 한다. 여기서 제사는 구약시대의 제사가 아닌, 한국적 유교의 제사를 의미한다.) 이는 마가복음 3장 초반에 나오는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면 안된다는 규칙을 들고 나와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는지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 사람의 병을 고쳐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것을 문제삼아 예수의 유대인으로서의 자격에 흠집을 내고 결격사유가 된다고 주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수의 존재와 바리새파를 향한 예수의 적개심은 바리새인들에게는 큰 정치적, 종교적 걸림돌이었다. 예수께서 손이 불편한 사람을 불러 세우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안식일 논쟁은 복음서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 안식을 논쟁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율법보다 하나님의 법, 즉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평화의 메시지가 더 우위에 있음을 보이셨다. 바울은 후에 여러 서신서를 통해서 이것을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설명한다.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정신, 즉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 창조의 능력을 모방한 것이 유대교의 율법이고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불완전 할 수 밖에 없다.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simulacre이다. (들뢰즈)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구현된 예수의 정신보다 보이는 불완전한 율법을 더 믿으며 모든 권위를 부여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갇혀있는 정신 세계를 이 안식일 논쟁을 통해 폭로하고 있다. 안식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선한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은 그것이 안식일의 목적이고 안식일의 정신이기도 하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점은 잘 드러난다.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와 목사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이 마가복음 3장에 드러난 예수님의 정신을 자신들의 목회적 자리에서 구현해 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바리새인들과 같이 불완전한 율법에 갇혀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신앙을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예수의 정신에 비추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예수의 정신에 반하는 행동을 하도록 요구하고 그것이 믿음의 행동인 것처럼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는 목사와 교회의 리더들을 본다면 과감히 그런 곳은 떠나야 한다. 그들은 예수를 보았으나 보지 못한 바리새인들과 같고, 철학이 없어 자멸길을 가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고, 자신의 빈약하기 짝이없고 때로는 잘못된 신학적 이해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며 그것만 옳다고 주장하는 예의없고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천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스스로 물어야한다. 자신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가? 아니면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