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은 평등의 이념을 따르고 있다. 제 2장 11조 1항은 이렇게 적고 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는 말과 2장 11조 1항이 함의하고 있는 헌법의 가치가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는 법률에 의해 결정되고 조정된다. 차별금지법은 그 헌법의 가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너무도 당연하게 차별금지법은 이번에 갑자기 생겨난 법이 아니다. 2007년 10월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을 입법 예고 하였으나 개신교계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결국 17대 국회에서 통과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그 이후 차별금지법은 후대 국회에서 꾸준히 발의되었으나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되었다. … 헌법적인 가치를 실현하기위해 필수적인 이 차별금지법을 도대체 왜 교회들과 소위 이름있는 목사들은 들고 일어나 너도 나도 반대하는가? 도대체 차별금지법의 내용은 무엇이길래.
2020년 장혜영 의원등 10명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의 최신 버전의 제안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學歷),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한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ㆍ예방하고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차별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포괄적이고 실효성 있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함으로써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평등을 추구하는 헌법 이념을 실현하고, 실효적인 차별구제수단들을 도입하여 차별피해자의 다수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신속하고 실질적인 구제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평등하게 일하고 적절한 보수를 받는 것, 교육의 기회를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것, 행정적인 차별을 받지 않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법안의 내용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정당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아마도 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개신교계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부분을 주요한 문제로 여기지 않나 싶다. 동성애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의견들은 있을 수 있기에 그걸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이 글의 초점은 동성애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이념인 국민주권, 국민자치, 복지주의, 평등주의에 대한 글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이념은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인정을 바탕으로 그것을 보장하는 국민이 주인인 자치/복지국가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 실행에 평등은 기본요건이 된다.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과 동일하다. 동일한 권리를 지닌다. 모두 같은 자유와 책임을 진다는 개념이 바로 평등이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사회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사회다. 이 기본 요건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차별금지법이다. 차별금지법은 헌법의 기본 정신에 입각하여 어떠한 사람도 주어진, 그리고 자유롭게 선택한 조건들에 의해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 이 법률은 죄나 형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죄나 형벌은 그에 해당하는 법률안에서 다룰 사항이다. 차별금지법은 ‘누구도 차별 받아서는 안된다.’는 헌법상의 기본 전제를 바탕으로 그 실행방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법이다.
종교상의 이유로 특정 단어에 대해 호/불호를 갖을 수 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은 그에 대한 호/불호를 묻는 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이기 위해서 필요한 실행방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는다는 그 부분이 만약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아마도 헌법이 밝히고 있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종류의 사회체제를 소위 ‘정상’이라 여기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사람에 대해 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 사람은 죄인이니까, 저 사람은 정상인이 나에 비해 비정상인 사람이니까, 저 사람이 나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니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 그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렇게 불리우는 것이 좋던 싫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차별하는 사람이다. 차별하는 사람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들 사이에 경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나, 등급이 있다고 여기는 행동이 차별이다.
미국에 나와 유학생활을 시작한지 10년이 되어간다. 백인 중심의 사회에서 소수인종의 외국인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한국에서 느낄 수 없는 차별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마 내가 계속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차별금지법의 하나하나의 단어들이 이렇게 깊숙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이라는 단어의 나열들은 법률안의 한 귀퉁이에 적힌 의미 없는 글자가 아니라, 내가 겪어내고 있는 현실을 설명하는 단어들이며, 아시안계 소수인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정체성과 직결된 단어들이다. 한국에서 살고 있을 외국인들, 또는 외국계 국민들이 받을 수 있는 차별은 나의 현실이다. 그렇기에 차별금지법은 그들에게도 또한 나에게도 절실하다. 그렇게 보편적인 인류애는 나의 삶의 기본적인 법칙이고 의무가 되었다. LGBTQ, 무슬림, 여성 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포장하던 차별과 혐오이다.
예수께서는 보편적인 인류애를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구약성서의 모든 말씀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라는 두 가지 큰 카테고리로 요약하셨고 그 후 신약성서의 말씀은 하나님 사랑을 이웃에게 드러낸 예수의 삶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구체화된 사랑의 모습의 증언들이었다. 예수의 복음은 차별받고 소외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 있었고,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들의 존재론적 자유와 해방을 이루셨다. 그리고 그 증언들 사이에 우리는 서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예수의 복음의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를 잊고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예수의 복음을 따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 말할 수 없다. 미움이 아닌 용서와 혐오가 아닌 사랑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복음의 정신이다. 기독교인은 예수의 정신이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에 실현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한다. 새벽예배나 수요, 금요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을 깨달았다면 자신이 속한 사회를 변혁시키고 이웃을 위한 사랑을 체화시키는 프렉티스로 연결시켜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켜 가는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당부하고 싶다. 만약 당신의 목회자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있다면, 당장 그 곳을 떠나라. 만약 당신의 목회자가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는 발언을 설교 시간에 하고 있다면, 당장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