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광복절이다. 이 날은 한반도가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일본제국은 8월 15일 2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인정하며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36년간을 일제치하에서 목숨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던 모든 사람들의 염원이 이루어진 날이 광복절이다. 2020년 광화문 광장을 보며 맞이한 광복절은 조국의 해방을 기뻐하며 ‘합리적, 이상적 낙원’을 꿈꾸던 한민족의 바램이 무참히 깨어진 날이었다. 전광훈씨가 중심이 되어서 사랑제일교회-자유연대 주최로 집회를 열었다. 코로나19의 위험성을 무시하고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잠재적 위험에 빠뜨린 몰상식한 행위에 대한 규탄은 잠시 접어두자. 이러한 행동이 말이 되지 않는 멍청한 짓이라는 것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몰상식한 행동 그 이면에 보이는 또 다른 제국주의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하다. 제국주의(Imperialism)은 특정국가나 다른 나라, 지역 등을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정책이나 그러한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을 가리킨다. 제국주의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총과 칼, 전투기와 탱크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그것들을 제국주의가 겉으로 드러내는 존재의 양태일 뿐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지배하려는 욕망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영향력이다. 제국주의의 본질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다.
예수의 시대의 로마제국주의는 영역의 확장,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통합, 제국의 통치아래 모든 것을 무릎 꿇게 만드는 힘을 의미했다. 로마제국은 이러한 욕망을 실현할 만한 당대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었고, 통치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기술과 문명의 우위를 통한 지배력을 유지했다. 로마제국주의의 힘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 사건의 내용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흩어지지 않게 만드는 힘’에 대한 추구가 바로 제국주의의 심장에 있다. 예수께서는 단지 식민지 국민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로마제국에 반기를 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틀, 바로 그 제국주의적인 마인드셋을 문제 삼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국주의적인 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답, 사랑의 방식을 제시했다. 지배가 아닌 평화와 사랑이다.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 광복의 기쁨을 맞이한 광복절에 우리는 또 다른 제국주의의 실체를 목도하고 있다.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파의 잔재 세력들과 반공주의와 군사독재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한국사회의 극우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한 극우세력은 당연히 교회 안에도 존재한다. 뉴라이트 계열이라 불리기도 하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극우세력들은 너무 당연하게도 제국주의적인 방식을 숭상한다. 그것이 그들이 동의하는 욕망이고 그 욕망을 이루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인이라는 자아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 방법으로 제국주의적인 방식을 택하거나 선호한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이 선동을 당할 때, 기뻐한다. 그들의 시저를 찬양하고 우러른다. 그들의 시저가 이 정권이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받아들인다. 코로나19이 누군가의 테러에 의해서 자신의 교회안에 퍼졌다는 것을 믿는다. 정당한 절차를 따라 진행된 선거가 사기라고 하면 그렇게 생각한다. 고인의 죽음에 대한 모독을 하며 대통령에게 자살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대한민국을 북한에 통째로 북한에 바친다는 가짜뉴스에 아멘이라 화답한다.
보이는가? 그들에게 코로나19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의 욕망과 극우 기독교 세력의 변질된 욕망의 추구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제국주의적 욕망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전염병 정도는 그리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코로나19 정도는 컬레트럴 데미지일 뿐이다. ‘제2의 건국을 만들어가자는’ 그 말이 나에게는 그래서 그리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자신들의 제국주의의 욕망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그 솔직한 모습이 차라리 부럽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제국주의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예수의 사역의 방향이었다. 광화문의 집회는 시저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것인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제국주의적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제국주의적 욕망의 노예가 된 개신교인들에 나는 마음이 쓰인다. 그들이 옳은 신앙이라 굳게 믿고 의심치 않는 신념이 기독교의 신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기를 이 아침에 간절히 손모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