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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진정한 사과는 변화이다.

  • Post category:Med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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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체제에 순응하며 극보수화 되어버린 한국 개신교 교회의 목회자들과 리더들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는 것이 코로나19을 겪으며 극명하게 드러났다. 교회와 목사는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말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극우 세력을 넘어서 실제적이고도 잠재적인 피해를 주고 있는 사회의 악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정말 희망이 없는가? 광화문 사태 이후 개신교 내에서는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며 선긋기 하는 움직임들이 생겨났지만 과연 그들과 어떻게, 무엇이 다른지를 설명하고 보여주는데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안타까운 점은 극우 개신교 세력과 대척점에 있는 진보적인 개신교 단체들의 줄사과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안타깝다라고 내가 느낀 부분은 극우 개신교 세력과 성경과 기독교라는 단어 이외에는 별로 그들과 생각을 공유하거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진보기독교인들이 극우기독교 세력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지금 사과하고 있는 정직하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깨끗한 그리스도인들의 진심을 몰라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사과할 때이다.’, ‘사과하는 것이 맞다.’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극우 개신교 세력에 기여하지 않았더라도 그리스도의 정신에 어긋나게 나가고 있는 그들을 직접, 간접적으로 허용한 것에는 책임이 없지 않다. 그들을 향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었더라도 그것이 충분하지 못했다. 부족함도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그들을 향해 혀를 차며 벌레보듯 했다하더라도 그들을 형제 자매로 대하고 생각했다면 조금은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겠나. 그렇다면 그 결과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다. 잘못한 부분, 부족했던 부분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 사과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또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라는 지점에 생각이 이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사회 전반에 사과하는 것인가? 같은 극우개신교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기독교 인들에게 사과하는 것인가? 아니면 비기독교인들에게 사과하는 것인가? 혹은 자신 스스로에게 사과하는 것인가? 그 사과를 하는 주체가 과연 사과의 주체가 될 정당성은 있는가? 진정한 사과는 극우 개신교 세력 안에서 나와야 한다. 광화문 집회를 주도하고 참석해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세력, 조직적으로 집회를 준비하고 잘못된 정보로 사람들을 세뇌시킨 사람들, 맹목적으로 상식적이지 않은 말들을 그대로 믿은 사람들, 일부러 전화를 꺼놓고 자신의 동선을 숨기며 불특정의 타인들을 잠재적인 위험에 노출시킨 사람들, 그들은 정작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책임을 져야 할 주요 인물들은 검은 흑막 뒤로 숨어버리고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 반대하고 그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 나와 그들을 대신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누구를 위한 사과인가? 교회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윤리적인 민감도가 높은 사람들이다. 타인의 생명이 소중한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사단을 일으킨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당신이 비교인이라면 누구의 사과를 받아야 하겠는가? 누가 변화하길 원하는가? 넘쳐나는 사과는 아무것도 바꿔내지 못한다. 

극우 개신교 세력과 그들과 한몸인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변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한국 개신교는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현재 극우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아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 극우 개신교가 따르고 있는 그들만의 잘못된 복음은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물질주의적 사고관,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관, 혐오주의, 반지성주의, 친독재, 반민주 성향’이다.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과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많은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은 목회자의 잘못된 사상주입과 세뇌에 자신을 무방비로 내어 맞겼다. 질이 한 참 떨어지는 비신학적인 설교와 신변잡기의 이야기로 가득한 설교를 맹종했다. 그 결과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극우개신교 세력은 반사회적 단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들이 흔들고 있는 태극기는 누구를 위해 펄럭이는가? 그들이 부르짖는 ‘애국’의 대상인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극우 개신교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은 초현실적이리만치 추악하다. 그 모습을 하고 내 앞에 서있는 나의 형제 자매의 모습에 나는 할말을 잊는다. 너무도 당황스러운 마음에 지나가는 모두를 붙잡고 사과라도 하고 싶은 황망함이 온몸을 덮는다. 일본 제국주의의 트라우마가, 해방 후 두 세력으로 나뉘어 민족의 힘을 모으지 못했던 죄책감이, 남북으로 나뉘어 형제 자매를 도륙했던 경험이, 군부 쿠테타 세력에 힘없이 나라의 권력을 넘겨 주었어야 했던 무력함이, 독재세력의 탄압에 눈치보며 움츠러 들었던 비루함이, 독재세력에 협력하며 그 대가로 성장했던 교회의 난잡함이, 교회는 사회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되고 새벽기도와 수요예배와 금요철야에 충심으로 모이는 것이 신앙이란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실수가, 성장주의와 물질주의에 정신을 빼앗겨 돈 많이 벌고 잘 사는 것이 최고의 진리가 되어 버린 수치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가련한 사람들이 오늘의 극우 개신교를 만들었다. 한국 극우 개신교는 한국에만 있지 않다. 미국에 자리잡은 수 많은 한인교회들이 이 모든 특성들을 마치 쌍둥이처럼 공유하고 있다. 그 강도의 세기는 척박한 이민환경 속에서 무뎌지고 굳어진 이민한인교회가 더 할지 모른다. 나의 형제 자매들은 슬프게도 자정능력을 상실했다. 

이것이 적나라한 현실 인식이다. 해야 할 것은 사과가 아닌 ‘직시’ 와 ‘대면’이다. 괴롭지만 그로테스크한 극우 개신교를 대면해야 한다. 한국 개신교는 대면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극우 개신교가 추구했던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교회 안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싸워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메시지인 평화와 회복을 외쳐야 한다. 물질주의적 사고관을 버리고 하나님과 사람 중심의 교회로 변화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대형교회와 같이 건물을 올리고 부를 쌓아놓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약자를 돕고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회의 밑바닥을 살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극단적인 이분법적인 사고관을 벗어나야 한다. 모든 것을 흑과 백으로, 선과 악으로 구분해서 보는 미련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안식일의 율법을 어기고, 사기꾼과 도둑, 성매매 여성들의 친구를 자처하셨던 예수의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세상을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보면 모든 것이 간단해 보이지만 그토록 미련하고 폭력적인 짓은 없다. 어떤 경우에도 혐오를 조장하는 것은 교회의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배제와 차별은 기독교의 언어가 아니다. 포용과 용서가 기독교의 언어이다. 얼마전에 ‘만약 당신의 목회자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면 당장 그곳을 떠나라.’라는 글을 쓴적이 있다. 안타깝지만 그런 목사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길을 찾아 갈 수 있는 신학적인 소양이 부족하다. 마치 예수의 시대에 예수를 율법을 어긴 죄를물어 죽이고자 했던 유대종교지도자들과 같이 그들의 눈은 가려져 있다. 기독교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신비가 과학과 반대되지 않는다. 무늬만 과학인 가짜과학, 창조과학이 이야기하는 바는 믿을 것이 못된다. 제발 젊은 지구론을 맞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하지 마라.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잘못된 신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반지성주의라 불릴 지라도 나는 신앙의 지조를 지키겠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반지성주의는 못 배운 것이다. 독재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극대화된 모습이다. 예수께서 싸우신 제국주의의 욕망이다. 기독교는 독재를 용인하거나 부추기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깃든 하나님의 이미지와 만인 제사장설은 모든 사람이 고귀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고귀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 민주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이루어나가는 것이 기독교적인 방식이다. 제대로된 장로교회는 민주주의적 구조와 절차의 가장 진보한 모습을 보여준다. 목사와 일부 장로들에게 집중된 독재적 권력구조를 버리고 민주적인 교회 구조를 이루어야 한다. 

자정능력을 상실한 집단은 안타깝지만 주위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과 집단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시대적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그 한계를 인식하며 비뚤어지고 어그러진 모습을 바꿔나가야 한다. 철저한 쇄신과 자기반성, 그리고 과거와의 결별을 통한 변화만이 이 상황을 의미있게 만들 수 있다. 뜻있고 깨어있는 개신교인들의 귀에 시대적인 부름이 응하기를 바란다. 세상의 중심은 교회가 아니다. 세상의 중심은 깨어진 마음에 대한 민감도와 변화 할 수 있는 능력에 위치한다. 교회여! 변할 수 있겠는가? 변해야만 한다.